적절히 쉬어 가기
글. 한지형 법원도서관 조사심의관
들어가며: 쉼표를 쉼표라 부르지 못하던 시절을 아시나요?
가장 많이 사용하는 문장 부호 중 하나인 쉼표(,). 그 쉼표를 쉼표라 부르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 알고 계셨는지요? 「한글 맞춤법」(2014. 12. 5. 문화체육관광부 고시 제2014-39호)이 시행되기 전까지 문장 부호 ‘,’의 이름은 ‘반점’이었습니다. 쉼표[休止符]는 반점(,)과 가운뎃점(·), 쌍점(:), 빗금(/)과 같은 개별 문장 부호를 아우르는 단계를 일컫는 말이었습니다.⑴
조선어학회가 1933년 「한글 마춤법 통일안」을 제정할 당시에는 부호마다 한 줄 정도의 설명만 덧붙인 부록이 실려 있었는데, 1988년 「한글 맞춤법」 제정 시 문장 부호의 용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반점 등의 명칭이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반점’이라는 이름보다 ‘쉼표’라는 이름이 자리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학계, 출판계, 언론계 등에서 지속적으로 개정 의견을 제시하였고 결국 위와 같이 개정되었다고 합니다.⑵
우여곡절 끝에 쉼표라는 이름으로 돌아온 ‘,’. 오늘 조사심의관 코너는 쉼표 이야기입니다.
현실적인 쓰임에 맞도록 “자연스럽게”
「한글 맞춤법」 개정으로 바뀐 것이 이름만은 아니었습니다. 국립국어원은, ‘현실적인 쓰임에 맞도록 허용 규정을 대폭 확대한다’는 취지를 반영한 <문장 부호 해설> 개정판도 발간하였는데, 쉼표와 관련하여 가장 논란이 많았던 용례 중 하나인 접속 부사⑶ 뒤의 쉼표 사용례에 관한 설명을 바꾸었습니다. 즉, 종전에는 “문장 첫머리의 접속이나 연결을 나타내는 말 다음에 쓴다. 다만, 일반적으로 쓰이는 접속어(그러나, 그러므로, 그리고, 그런데 등) 뒤에는 쓰지 않음을 원칙으로 한다.”라고 설명하고 있었는데, 개정판에서는 “그리고, 그러나, 그런데, 그러므로 등과 같은 접속 부사의 뒤에서는 쉼표를 쓰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다. 접속 부사와 쉼표의 기능이 중복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쉼표는 꼭 접속의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므로 글쓴이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면 접속 부사의 뒤에서도 쉼표를 쓸 수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쓰이는’이라는 부분은 판단하기 어렵고 ‘원칙으로 한다’는 부분은 단정적인 느낌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물론 오랜 기간 ‘원칙’에 따라 ‘그러나, 그러므로, 그리고, 그런데 등’ 다음에 쉼표를 쓰지 않았던 탓에 지금도 이를 쓰지 않는 것이 원칙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비교적 최근에 국립국어원이 발간한 <공공언어 바로 쓰기>에서도 그렇고 법원도서관의 교정 실무도 그러합니다. 어쨌든, 이제 쉼표의 사용이, 적어도 접속 부사와 관련해서는, 맞고 틀리고의 문제나 원칙과 예외의 문제는 아니게 되겠습니다.
쉼표를 쓰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경우는 또 있습니다. 쉼표의 가장 기본적인 용례는 같은 자격의 어구를 열거할 때 그 사이에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거되는 어구 중 마지막 어구 앞에 ‘그리고’를 쓸 때 그 앞에는 쉼표를 쓰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합니다. <문장 부호 해설>에서는 어구를 연결할 때 쓰는 쉼표는 ‘그리고’를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에 쉼표와 ‘그리고’를 함께 쓰는 것은 일종의 중복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열거되는 어구 중에 맨 앞의 어구 뒤에 ‘그리고’를 쓰고 이어지는 어구들을 쉼표로 열거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⑷
정욱, 재용, 성민 그리고 은길이까지 모두 네 명이 시험에 합격했다. 정욱 그리고 재용, 성민, 은길이까지 모두 네 명이 시험에 합격했다.
쉬지 말아야 할 때와 쉬어야 할 때
여전히 쉼표를 쓰지 않아야 할 때도 있고 쉼표를 써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열거할 어구들을 생략할 때에는 줄임표를 쓰는데, 이때 줄임표 앞에는 쉼표를 쓰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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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같은 자격의 어구를 열거할 때 그 사이에 쓴다. |
한편 여러 가지 내용을 열거할 때 사용하는 ‘첫째, 둘째, 셋째……’, ‘먼저, 다음으로, 마지막으로……’ 등과 같은 어구 다음에는 쉼표를 써야 합니다.
(4) 열거의 순서를 나타내는 어구 다음에 쓴다.
(예) 첫째, 몸이 튼튼해야 한다.
(예)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마음이 편해야 한다.
쉼표의 위치도 중요합니다. ‘곧’, ‘즉’, ‘다시 말해’, ‘이를테면’ 등과 같이 한 문장 안에서 앞말을 다시 설명하는 어구의 경우 앞말 다음에 쉼표를 써야 합니다. 판결서 중에도 (아주 가끔이지만) “다음과 같은 사정 즉,” 또는 “… 점 이를테면,” 등으로 표기한 경우를 보게 되는데 “다음과 같은 사정, 즉” 또는 “… 점, 이를테면” 등으로 표기하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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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한 문장 안에서 앞말을 ‘곧’, ‘다시 말해’ 등과 같은 어구로 다시 설명할 때 앞말 다음에 쓴다. |
문장 첫머리에 ‘곧’, ‘즉’, ‘다시 말해’, ‘이를테면’ 등과 같은 어구가 나올 때 그 뒤에 쉼표를 쓸 것인지 말 것인지는 글쓴이가 임의로 판단해서 정할 수 있습니다. 한편 <문장 부호 해설>에서는, 한 문장 안에서나 문장 첫머리에서 앞말의 내용을 전환하거나 앞말과 반대되는 내용을 기술할 때 사용하는 어구인 ‘반면(에)’, ‘한편’ 등의 뒤에 쉼표를 쓸 것인지, 쓰지 않을 것인지도 글쓴이가 임의로 판단해서 정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⑹
한때 같은 ‘쉼표’였던 가운뎃점(·)
글을 쓰다 보면 가운뎃점(·) 대신에 쉼표를 써도 되는지 궁금할 때도 있습니다.
어구들을 낱낱으로 열거하지 않고 일정한 기준에 따라 묶어서 나타낼 때 묶음 사이에는 쉼표를, 같은 묶음에 속한 어구들 사이에는 가운뎃점을 씁니다.
(1) 열거한 어구들을 일정한 기준으로 묶어서 나타낼 때 쓴다.
(예) 민수·영희, 선미·준호가 서로 짝이 되어 윷놀이를 하였다.
각각의 어구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전체 집합의 필수적인 요소가 되는 경우 ‘짝을 이룬다’고 하는데, 이렇게 짝을 이루는 어구들 사이에는 가운뎃점을 쓰는 것이 원칙이지만 가운뎃점을 쓰지 않거나 쉼표를 쓸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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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짝을 이루는 어구들 사이에 쓴다. 다만, 이때는 가운뎃점을 쓰지 않거나 쉼표를 쓸 수도 있다. |
공통 성분을 줄여서 하나의 어구로 묶을 때에는 가운뎃점을 쓰는 것이 원칙이지만 쉼표를 쓰는 것도 가능합니다. 주의하여야 할 점은 하나의 단어로 굳어진 경우, 즉 표준국어 대사전에 하나의 단어로 등재된 경우에는 가운뎃점을 쓰지 않고 한 단어로 표기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판결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는 ‘민형사’, ‘원피고’, ‘인허가’, ‘국내외’, ‘직간접’, ‘국공립’, ‘선후배’ 등이 있습니다.
(3) 공통 성분을 줄여서 하나의 어구로 묶을 때 쓴다. [붙임] 이때는 가운뎃점 대신 쉼표를 쓸 수 있다.
(예) 금·은·동메달
(예) 통권 제54·55·56호
(예) 금, 은, 동메달
(예) 통권 제54, 55, 56호
정말 중요한 순간은
쉼표는 어떤 어구나 바로 다음 말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지 않음을 나타낼 때도 사용합니다. 앞에 나오는 말은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말과 ‘주술 관계’, ‘수식 관계’ 또는 ‘접속 관계’ 등에 놓이는 것이 일반적인데 때로는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말과 직접 관계를 맺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쉼표를 쓰지 않으면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말과 직접 관계를 맺는 것으로 잘못 해석될 수 있으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해 쉼표를 씁니다.
(12) 바로 다음 말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지 않음을 나타낼 때 쓴다.
(예) 갑돌이는, 울면서 떠나는 갑순이를 배웅했다.
(예) 철원과, 대관령을 중심으로 한 강원도 산간 지대에 예년보다 일찍 첫눈이 내렸습니다.
개인적으로 법률 문장에서 쉼표의 가장 중요한 용례는 이것이 아닐까 합니다. 쉼표 하나가 있는지 없는지,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법령의 해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대법원 판례나 헌법재판소 결정례에서 확인할 수 있는 표현들을 소개해 봅니다.⑺⑻
… 들어 있는 가운뎃점은 서로 대등하거나 쉼표로 연결된 단어들 사이보다 더 밀접한 경우에 사용하는 것이므로 … 문구 전체가 … 대등하게 연결된 것으로 보는 것이 문리상 합리적이라고 보이는 점 … (대법원 2008. 8. 11. 선고 2005다56131 판결 중) 문화체육관광부 고시 제2014-0039호로 2014. 12. 5. 고시된 ‘한글 맞춤법’에 의하면, 문장 부호 중 쉼표(,)는 “같은 자격의 어구를 열거할 때”와 “바로 다음 말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지 않음을 나타낼 때” 사용할 수 있는바, … 부분에 사용한 쉼표(,)는 후자의 용법으로 사용한 것으로 해석되고 … (헌법재판소 2015. 5. 28. 선고 2012헌마410 전원재판부 결정 중)
마치며: 적절히 쉬어 가기
정리를 하고 보니 ‘적절히 사용하여야 한다’는 말씀을 장황하게 드린 것 같습니다. <문장 부호 해설>도 쉼표에 관한 설명을 “적절하게 조절하여 쓰면 됩니다.”라고 마무리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겠습니다. 쉼표는 원래 정답이 없는 부호인데 부질없이 답을 찾아 헤맨 듯합니다. 결국 여유를 가지고 더 적절한 사용을 위해 고민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이런 마음을 일깨워 준 글귀 하나 소개해 드리면서 마치겠습니다.
마침표처럼 확신에 차 단정 짓지 않고 쉼표처럼 망설이고 주저하며 살고 싶다.
쉼표처럼 가쁜 숨결 쉬게 하고 가만, 가만히 세계를 음미하며 살고 싶다.
- 이재무, 쉼표처럼 살고 싶다-
⑴ 2014년 개정 전에는 이처럼 개별 부호들을 아우르는 단계로 Ⅰ. 마침표[終止符], Ⅱ. 쉼표[休止符] 등을 설정하였으나 「한글 맞춤법」을 개정하면서 그러한 단계 자체를 제외하였습니다.
⑵ 한편 위 개정 당시 부호 ‘,’를 가리키는 기본적인 용어로 ‘쉼표’를 인정하여 언어 현실에 부합하도록 하면서도, ‘반점’이라는 용어도 그대로 쓸 수 있도록 함으로써 용어 교체로 말미암아 둘 중 어느 것이 맞고 틀리느냐의 문제는 생기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⑶ 문법적 견해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국어 문법에서는 ‘접속사’라는 품사를 설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데’, ‘그리고’ 등의 품사는 ‘부사’로 분류됩니다. 국어에서는 부사를 ‘성분 부사’와 ‘문장 부사’로 나누며, ‘문장 부사’는 ‘양태 부사’, ‘접속 부사’로 나누어집니다.
⑷ 참고로 영미권에서는 세 개 이상 같은 자격의 어구를 열거할 때 마지막 어구 앞에 삽입되는 “and” 앞에 사용되는 comma(,)를 Oxford comma(또는 serial comma)라 부릅니다. 그 사용이 문법상 원칙인지에 대한 견해의 대립은 있으나 미국 연방대법원 판례 등에서는 일관되게 Oxford comma를 사용하고 있고, 법원도서관이 발간하는 영문판례집이나 영문저널도 그 예를 따르고 있습니다(예: We sell books, videos, and magazines).
⑸ 참고로 줄임표는 앞말에 붙여 쓰는 것이 원칙입니다. 다만 문장이나 글의 일부를 생략할 때는 앞뒤를 띄어 씁니다(예: 아닙니다. …… 같은 환경에서). 점은 가운데에 찍는 대신 아래쪽에 찍을 수도 있고(예: 실은......) 여섯 점 대신 세 점만 찍을 수도 있습니다(예: 실은...).
⑹ 다만 법원도서관의 교정 실무에서는, 법원 맞춤법 자료집(전정판)의 내용(‘한편’, ‘다만’ 등을 ‘일반적으로 쓰이는 접속어로 보고 쉼표를 쓰지 않음을 원칙으로 한다는 내용)과 궤를 같이 하여 쉼표를 붙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⑺ 그 외 문장 부호, 특히 쉼표의 위치 등을 법령 또는 계약 해석의 한 요소로 기재하고 있는 것으로는, 서울고법 2020. 6. 11. 선고 2019나2042496 판결(확정) 등 다수의 판결이 있습니다.
⑻ 외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비교적 최근에도 앞서 언급한 Oxford comma의 사용 여부가 문제 된 미국 연방항소법원의 판결이 있었는데[O’Connor v. Oakhurst Dairy, 851 F.3d 69 (1st Cir. 2017)], ‘packing for shipment or distribution of’의 해석이 문제 된 사안에서, 연방항소법원은 ‘or’ 앞에 comma가 없음으로 인해 중의적 해석이 가능하게 된 상황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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