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현진은 되지만 리정혁은 안 되나?
글. 한지형(법원도서관 조사심의관)
지난 겨울, 북한 지역에 불시착한 재벌 상속녀와 북한군 장교의 러브스토리를 그린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인기몰이의 일등공신은 배우들의 연기, 그중에서도 맛깔난 북한말 대사 연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배우들이 북한말을 잘 표현해 준 덕분에 엉뚱한 설정임에도 극 중 상황에 몰입하며 드라마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드라마 방영 내내 귀에 설게 느껴지던 대사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여주인공이 틈만 나면 부르던 “리정혁”이었습니다. 북한군 사병들이나 주민들이 부르는 “리정혁”은 전혀 어색하지 않았는데 “윤세리”의 “리정혁”만큼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습니다.
문득(솔직히 말하면 업무상) 법원에서는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류현진 선수는 다들 “류현진”이라 하고 판결서에도 수많은 류○○이 등장하는데 그건 괜찮은지도 궁금해졌습니다. 조사심의관 코너 이번 호에서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조선어학회가 만든 두음법칙
본래 우리말 첫머리에는 ‘ㄹ’이 오지 못하고 순우리말에도 ‘ㄹ’로 시작되는 단어는 없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들여온 한자에는 ㄹ‘ ’로 시작되는 것도 있었고 당연히 ‘糧食’과 老‘ 人’처럼 ㄹ‘ ’로 시작되는 한자가 첫머리에 놓이는 단어도 만들어졌습니다.
한자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량식], [로인]으로 읽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우리말에 없는 소리로 구성된 말이 불편하게 느껴져서인지 ‘ㄹ’을 ‘ㄴ’으로 바꿔 [냥식]과 [노인]으로 말하게 되었고 ‘냐, 녀, 뇨, 뉴, 니’ 등은 다시 ‘야, 여, 요, 유, 이’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조선어학회는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하면서 이러한 변화를 반영해 어두(語頭)에 ‘ㄹ’이나 ‘ㄴ’을 쓰지 않도록 하는 두음법칙 규정을 두었습니다. 그 결과 ‘양식’과 식‘ 량’에 같은 한자가 포함되어 있지만 달리 쓰고 달리 발음하게 되었습니다.1)
북한에서는...
그런데 북한에서는 1966년 「조선말규범집」을 간행하여 ‘평양말을 중심으로 하여 노동자 계층에서 쓰는 말’을 ‘문화어’라 하여 새로운 표준말로 사용하게 하였는데 위 규범은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따르지 않습니다.2)
구체적으로 보면 「조선말규범집」의 「조선말맞춤법」에서는 한자어를 원음대로 적도록 하고 있고 「조선말규범집」의 「문화어발음법」은 모든 모음 앞의 ‘ㄹ’은 [ㄹ]로 발음하는 것을 원칙으로 규정하였습니다.
|
「조선말맞춤법」 [녈], [뉼]로 발음한다. |
북한 사람들이 “리정혁”이라고 쓰고 [리정혁]이라 발음하는 것은 그들의 어문규범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반면 우리나라는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의 두음법칙을 이어받았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 고시 「한글 맞춤법」(제2017-12호)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한편 문화체육관광부 고시 「표준어 규정」(제2017-13호)에서는 표준어의 실제 발음을 따라 발음하도록 하고 있습니다.3)
「한글 맞춤법」 ㉠ 여자(女子) 연세(年歲) 요소(尿素) 유대(紐帶) 이토(泥土) 익명(匿名) ㉡ 녀자 년세 뇨소 뉴대 니토 닉명 제11항 한자음 ‘랴, 려, 례, 료, 류, 리’가 단어의 첫머리에 올 적에는, 두음법칙에 따라 ‘야, 여, 예, 요, 유, 이’로 적는다.(ㄱ을 취하고, ㄴ을 버림.) ㉠ 양심(良心) 역사(歷史) 예의(禮儀) 용궁(龍宮) 유행(流行) 이발(理髮) ㉡ 량심 력사 례의 룡궁 류행 리발 다만, 다음과 같은 의존 명사는 본음대로 적는다. 제12항 한자음 ‘라, 래, 로, 뢰, 루, 르’가 단어의 첫머리에 올 적에는, 두음법칙에 따라 ‘나, 내, 노, 뇌, 누, 느’로 ㉠ 낙원(樂園) 내일(來日) 노인(老人) 뇌성(雷聲) 누각(樓閣) 능묘(陵墓) ㉡ 락원 래일 로인 뢰성 루각 릉묘
제3장 소리에 관한 것
제5절 두음법칙
제10항 한자음 ‘녀, 뇨, 뉴, 니’가 단어 첫머리에 올 적에는, 두음법칙에 따라 ‘여, 요, 유, 이’로 적는다.
(ㄱ을 취하고, ㄴ을 버림.)
다만 다음과 같은 의존 명사에서는 ‘냐, 녀’ 음을 인정한다.
냥( 兩 ) 냥냥쭝(兩-) 년(年)(몇 년)
리(里 ) : 몇 리냐?
리(理 ) : 그럴 리가 없다.
적는다.(ㄱ을 취하고, ㄴ을 버림.)
이런 원칙은 고유명사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북한에서 쓰이는 고유명사라 하여 예외는 아닙니다. 국립국어원은 1992. 10. 19. 문화체육관광부 국어심의회 한글분과위원회 심의 및 결정에 따라 인명, 지명 등 북한의 고유명사를 표기할 때에도 「한글 맞춤법」을 준수하여야 한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국립국어원은 2013. 5. 30.에도 북한 고유명사를 표기할 때 두음법칙에 따라 “량강도”, “로동신문”은 “양강도”, “노동신문”으로 표기하여야 한다고 다시 한번 강조하였습니다. 결국 우리나라의 어문 규범에 따르면 “리정혁”이 아닌 “이정혁”이라 쓰고 [이정혁]이라 발음하여야 합니다.
그럼 류현진은?
「한글 맞춤법」대로 하자면 류현진 선수의 이름도 “유현진”으로 표기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신문 기자들은 하나같이 “류현진”이라 쓰고 아나운서들도 [류현진]이라고 발음합니다. 국어 학자들은 대법원 예규에서 그 근거를 찾습니다.
1996. 10. 25. 제정된 대법원예규인 「호적에 성명을 기재하는 방법」에서는 성(姓)의 한자음이 ‘리, 류, 라…’인 ‘李, 柳, 羅…’를 호적부에 한글로 표기할 때에는 두음법칙에 따라 ‘이, 유, 나…’로 표기하도록 규정하였습니다. 이와 다른 표기를 발견한 호적공무원에게는 경정 의무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법원은 이러한 규정이 헌법상 인격권에서 비롯하는 성 표기방법 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보고 2007. 7. 20. 위 예규를 개정하여 ‘일상생활에서 한자 성을 본래의 음가로 발음 및 표기하여 사용하는 등 성의 한글 표기에 두음법칙 적용의 예외를 인정할 합리적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두음법칙에 따르지 않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호적예규 제722호).4) 현재 시행되는 대법원예규인 「가족관계등록부에 성명을 기록하는 방법」(가족관계등록예규 제510호)의 규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관계등록부에 성명을 기록하는 방법」 예외를 인정할 합리적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2. 한글 맞춤법에 의한 성의 한글 표기
한자로 된 성을 한글로 기록할 때에는 한글 맞춤법에 따라 표기한다.
다만 일상생활에서 한자 성을 본래의 음가로 발음 및 표기하여 사용하는 등 성의 한글 표기에 두음법칙적용의
류현진 선수가 한국에서는 물론 미국에서도 “RYU”나 “류현진”으로 활동5)하는 것을 보면 적어도 본인은 일상생활에서 [류현진]으로 발음하고 “류현진”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해 주는 것이 류현진 선수의 인격권을 존중하는 셈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류현진 ≠ 리정혁
다시 북한 이름으로 돌아와 봅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본래의 음가대로 사용하고 있는 성을 가족관계등록부에 그대로 기재할 수 있고 따라서 가족관계등록부에 기재되어 있으면(그리고 이를 달리 정정하지 않고 있으면) 일상생활에서 그렇게 발음, 표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터인데 북한 사람은 사정이 다릅니다. “리정혁”은 우리나라 가족관계등록부에 등록되어 있을 리 없고 생활 속 사용 상황을 확인하기도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국립국어원도 이런 이유에서 “류현진”은 되지만(그런 대법원예규를 존중하지만) “리정혁”은 안 된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상황에 맞게...
국어기본법에 따르면 ‘어문규범에 맞추어’ 공문서를 작성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으니 판결서에서도 원칙적으로는 「한글 맞춤법」에 따라 표기하여야 할 것입니다. 다만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경우(소송관계인으로서 법정에 출석하거나 자료를 제출하는 경우)에는 그 발음과 표기를 존중하여 주는 것도 허용되고 오히려 바람직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봅니다.
“윤세리”와 “리정혁”의 알콩달콩 러브스토리 속에 숨어 있던 두음법칙 이야기 어떠셨나요?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지기 쉽지 않았듯 남과 북의 학자들이 모여 추진하는 겨레말큰사전 사업도 난관이 많은데 그중 가장 접점을 찾기 힘든 주제가 두음법칙이라고 합니다. 갈라져 살아온 세월만큼 서로의 생각 차이도 큰 모양입니다. 드라마에서처럼, 남북의 한글 문제도 해피엔딩으로 끝나기를 소망하면서 저의 첫 조사심의관 코너를 마칩니다.
1) 이 부분은 한성우, 설송아 공저 ‘문화어 수업(어크로스)’을 참고하였습니다.
2) 한성우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이 전파된 이후에도 평안도 지역에서는 다른 지역과는 다른 형태로 두음법칙이 자리 잡았고 분단 이후 북한에서는 1946년 「조선어신철자법」, 1954년 「조선어철자법」을 규정하면서 이러한 차이를 반영하여 두음법칙을 쓰지 않고 한자 원음대로 표기한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합니다.
3)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은 국어심의회의 심의를 거쳐 한글 맞춤법, 표준어 규정, 표준 발음법 등의 어문규범을 제정하거나 개정하고 그 내용을 관보에 고시하여야 합니다(국어기본법 제3조 제3호, 제11조).
4) 이러한 예규 개정은 대전지방법원 2006. 6. 12.자 2006브15 결정(‘문화 류씨’로서 종래 수십년간 호적 및 각종 자격증에 한글 성으로 ‘류’를 사용하여 온 사람이 자신의 호적에 성이 ‘유’로 표기된 것의 정정을 구한 사안에서, 성을 한글로 표기함에 있어 어떻게 결정하고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 개인의 구체적인 상황이나 의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국가가 일방적으로 두음법칙의 적용을 강제하는 것은 개인의 자기표현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핵심요소의 하나로 하는 인격권을 침해한 규정으로 헌법에 위배된다고 보아 호적을 정정할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한 사례)이 계기가 되어 이루어졌습니다.
5) 류현진 선수는 2019년에는 메이저리그 Player’s weekend 행사로 한글 이름 “류현진”이 기재된 유니폼을 입고 등판하기도 하였습니다.
- [즐거운 세상 X 조사심의관 코너] 전통 법제로 보는 법과 법원의 역사 2024.04.05
- [조사심의관 코너] 잘 띄어 쓰면 좋은 '띄어쓰기' 2024.02.08
- [조사심의관 코너]새로워진 내 손안의 도서관, 법원도서관 전자책 서비스 2023.12.06
- [조사심의관 코너]空間, 걸으며 만나는 법원 2023.10.10
- [조사심의관 코너] 법원도서관 홈페이지 유용하게 활용하기 2023.08.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