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 오디세이]흑인의 소울푸드에서 한국인의 소울푸드로_지금까지 이런 치킨은 없었다 ‘치느님’

트렌드에 주목하라

2019.04.02

대한민국에는 누구도 욕할 수 없는 두 ‘느님’이 있다. 국민MC 유재석을 지칭하는 ‘유느님’과 ‘치킨’을 지칭하는 ‘치느님’이다. 음식마다 나름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치킨 역사는 조금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흑인의 고단한 삶과 대한민국 아버지의 사랑까지 담고 있으니 말이다.
치킨, 이것은 음식인가, 역사인가.

흑인들이 치킨을 먹었다

우리는 닭을 기름에 튀겨낸 ‘프라이드치킨’을 ‘치킨’이라 줄여 부른다.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이 마렝고 전투에서 승리한 뒤 먹은 ‘치킨 마렝고’를 비롯해 세계 역사 속에는 치킨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음식들이 종종 등장하지만, 현재와 가장 유사한 치킨의 모습은 19세기 미국의 흑인 노예들이 해먹던 ‘딥 프라이드치킨(deep fried chicken)’에서 찾을 수 있다.

19세기 당시 미국 남부의 정통 닭요리는 닭을 통째로 오븐에 굽는 로스트 치킨이었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흑인 노예들은 백인들이 버린 닭의 목과 날개를 주워다가 뼈째로 튀겨 먹었는데, 이 음식이 지금의 프라이드치킨과 매우 흡사하다.

흑인들의 치킨이 전 세계에 알려진 건 커널 샌더스 덕분이다. 그가 1952년 유타 주의 솔트레이크시티에서 흑인들의 레시피를 활용한 치킨집을 열었는데, 그 치킨집이 글로벌 치킨 프랜차이즈 ‘KFC’의 시작이다.

흑인의 궁핍한 삶을 대변하던 치킨은 종종 인종차별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2013년 백인 골퍼 세르히오 가르시아는 한 골프 대회 시상식에서 타이거 우즈를 향해 “프라이드치킨을 대접하겠다”고 말해 논란의 중심에 선 바 있다.

치킨은 영화 속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영화 <그린북>은 1960년대가 배경이다. 인종차별이 심했던 미국 남부로 콘서트 투어를 떠난 흑인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 박사는 자신의 백인 운전기사인 토니 발레롱가가 KFC에서 치킨을 잔뜩 사다가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을 본다. 이때 돈 셜리 박사는 경멸의 눈빛으로 자신의 운전기사를 쳐다보는데, 과연 돈 셜리 박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족 사랑과 생계수단 사이

흑인의 음식으로 인식됐던 치킨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소울푸드’나 ‘치느님’이라 불리는 현상은 흥미롭다.

우리나라 치킨의 역사는 1960년 서울 명동에서 시작된 ‘전기구이 통닭’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전기구이 통닭은 ‘아버지’를 상징하는 음식이었다. 월급날이면 퇴근길에 사들고 와 온 가족에게 먹이던 통닭은 아버지의 책임감이자 가족에 대한 사랑을 상징했다. 1970년대에 이르러 치킨은 대중음식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국내 양계산업이 급성장하면서 닭의 대량공급이 가능해졌고, 콩기름도 대량생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1977년에는 한국 최초의 프랜차이즈 치킨집이 문을 열었고, 재래시장에서도 기름을 부은 큰 가마솥에 치킨을 튀겨 팔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매콤한 고추 양념을 더한 양념치킨도 선을 보인다. 치킨을 국민음식으로 바꿔놓은 사건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이었다. 간편하게 먹고 마실 수 있는 치킨과 맥주는 박진감 넘치는 축구경기와 그야말로 찰떡궁합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치킨 시장은 ‘레드오션’이다. 인기가 좋은 만큼 치킨을 파는 집도 그만큼 늘어난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의 2019년 발표 자료에 따르면 2017년 전국 치킨 프랜차이즈 가맹점 수는 2만 4천여 개로 집계됐다. 동네 치킨집까지 합할 경우 국내 치킨집이 전 세계 맥도날드 점포 수보다 많다고 하니, 우리나라의 치킨 사랑은 좀 유별난 구석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현재에도 치킨은 대한민국 아버지를 상징한다. 과거의 전기구이 통닭이 가족에 대한 아버지의 책임감과 사랑을 상징했다면 지금의 치킨은 아버지의 생계수단과 동격이다. 치킨집은 ‘자영업의 무덤’으로 불리지만 비교적 저렴한 창업 비용으로 인해 많은 아버지들이 가족 생계를 위해 치킨집을 개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600만 관객의 웃게 한 영화 <극한직업> 속 대사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네가 소상공인을 잘 모르나본데, 우린 다 목숨 걸고 해!” 영화 속 상황은 웃긴데, 대사는 왠지 짠하다. 영화 속 상황처럼 우리를 웃게 하기도, 슬프게 만들기도 하는 치킨의 현주소. 대한민국에 이런 음식이 또 있을까.

글. 박민우(맛 칼럼니스트)

"트렌드에 주목하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1 2 3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