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활체육복싱대회 데뷔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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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활체육복싱대회 데뷔전 이야기

2016.10.04

나의 생활체육복싱대회 데뷔전 이야기

시작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아내는 늘 살을 빼고 싶어 했다. 여러 운동기구가 우리 집에 와서는 어김없이 빨래 건조대로 변해갔다. 재작년(2014년) 겨울 어느 날 갑자기 아내는 복싱으로 승부를 볼 작정이라고 선언했다. 다음 날 집 근처 복싱 체육관에서 아내와 나는 복싱이 얼마나 건강과 정신에 좋은 것인지 관장과 한참을 이야기하였다. 복싱이 아내로부터 나에게로 걸어왔다. 다음날부터 난 복싱을 시작하였다.

복싱을 한다고 생각하니 27년 전 일이 떠올랐다. 나는 육군 상병이었다. 특전사 출신인 거구의 대위는 사령부에서 주최하는 태권도대회에 우리 부대도 참가해야 한다면서 선수를 뽑는다고 했다. 후방인지라 뛰어난 인재는 없었고 발차기 몇 번으로 선수가 확정되었다. 그나마 몇몇은 사회에서 1단이라도 딴 사람들이었는데, 나와 다른 중대의 한 일병은 그저 군대에서 조금 배운 것으로 팔자에 없는 선수가 되었다. 우리 둘은 늘 구박과 멸시를 받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 일병은 나중에 샌드백 역할을 맡아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대위의 화풀이는 나에게 더 격하게 쏟아졌다. 거기다 조롱까지 보태졌다. 결심을 해야 했다. 아무리 군대지만 인간으로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빛보다 빠른 속도로 “저 못하겠습니다.” 하는 소리가 대위를 향해 달려갔다. 엄청난 폭언과 분노에 찬 목젖 누르기 그리고 폭행이 이어졌다. “뭐, 못한다고? 감히 육군 상병 XX가 대위한테 대들어 어쩌고 저쩌고” 에라 모르겠다, 이왕 내친 걸음이니 될 대로 되어라.

나는 버텼다. 드디어 웰터급 선수가 교체되고 난 해방되었다. 초등학교 씨름 선수 출신인 다른 중대의 상병이 대회를 코앞에 두고 대신 나갔는데 지금 기억으로 모두들 썩 좋은 성적을 거두진 못한 것 같았다. 나중에 기형도의 장미빛 인생에서 “단 한번이라도 저 커다란 손으로 그는 그럴듯한 사내의 목덜미를 쥐어본 적이 있었을까?”라는 구절을 읽다가 그 시절이 생각났다. 그 이후 정말 나는 그럴듯한 상대의 목덜미를 쥐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나의 생활체육복싱대회 데뷔전 이야기

줄넘기와 속칭 칙칙폭폭으로 체육관 최고령 선수의 훈련(?)이 시작되었다. 관장은 첫날부터 세게 하면 너무 힘드실 테니 연세를 생각하셔서 천천히 하라고 했다. 아, 이제 연세라는 소리를 듣는구나. 진도는 빨랐다. 관장은 자기가 복싱을 배울 때는 원, 투 스트레이트만 3년을 했는데, 요즘 그렇게 하면 아무도 체육관을 찾지 않는다고 하였다. 일주일 안에 잽, 스트레이트, 훅, 어퍼컷을 배우고 글러브를 착용하였다. 보란 듯이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샌드백을 두들겼다. 가끔씩 링 위에서 관장이 대주는 미트도 힘껏 때려 주었다. “아이고, 젊을 때 배우셨으면 선수 되셨겠습니다.” 관장이 너스레를 떨었다. 어깨에 힘 좀 빼고 치라는 소리다. 경력이 좀 된 관원들은 링 위에서 스파링도 하였다. 제법 격렬하게 스파링을 하는 것을 보고 복싱을 시작할 때 나도 빨리 스파링을 해 보아야지 했던 생각들이 싸~악 달아났다.

그럭저럭 6개월여가 지나자 관장이 헤드기어를 착용하게 하고 스파링 연습을 하자고 하였다. 때리지 않을 테니 걱정 말라고...... 드디어 l라운드 공이 울렸다. 허공을 가르는 나의 가엾은 원,투 스트레이트. 가련하게 보였는지 가끔씩 관장이 가드를 하고 대주면서 마음껏 주먹을 휘두르라고 하는데 왜 그렇게 주먹은 무거운지. 그렇게 첫 스파링 연습은 녹초가 된 채 끝났다.

몇 주 후 관장은 입대를 앞둔 젊은 관원과 스파링을 시켰다. “아버님뻘 되시니까 너무 세게 하면 안 돼” 하는 당부와 함께. 아닌 게 아니라 이 친구 주먹을 휘두르지 않고 방어만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한 대 맞더니 바로 반격을 하는데 눈은 감기고 주먹은 하나도 안 보이고 빨리 공이 울리기만을 기다렸다. 2회전을 마치고 나서 모든 운동선수를 존경하게 되었다.
스파링을 몇 번 해보니 이제 생활체육복싱 대회에 나가보고 싶었다. 마침 관장도 권했다. 운 좋으면 한번만 이겨도 우승이라고. 시나리오는 완성되었다. 나는 40대의 마지막 해에 생활체육복싱대회에 나가 멋지게 우승을 거머쥐고 여봐란 듯이 자랑할 일만 남은 것이다.
체육관 내 점점 강한 상대와 스파링을 하고 어느 정도 자신감도 붙었다. 드디어 2016. 8. 28.로 D-day가 정해지고 나는 주위에 복싱대회에 나간다고 일부러 떠들고 다녔다. 행여 겁을 집어먹고 중도에 그만두는 것을 미리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먼저 경험을 치른 어떤 관원은 친절하게도 몇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실전은 정말 다릅니다. 링에 올라가면 머리가 하얘지고 심한 긴장 때문에 누가 다리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 겁니다. 그리고 절대 가족은 데려가지 마십시오. 저는 아들이 보는 앞에서 다운을 당했는데 당시 가족들의 충격이 꽤 오래 가서 가족들과 그 이야기를 하다가 함께 손을 잡고 울었던 적도 있습니다.” 조언이 고마워 고개를 주억거리기는 했지만 이게 조언인지 뭣인지?

대회를 일주일 앞두고 규정에 따라 50대부-80킬로그램으로 제35회 KBI 전국생활체육복싱대회 겸 제1회 마포구연합회장배 생활체육복싱대회(장소:마포구민체육센터)에 출전 신청을 하였다. 참가 현황을 보니 그 나이 그 무게의 신청자는 나밖에 없었다. 이러다 상대가 없어 링에 못 올라가는 것 아닌가 하고 내심 걱정(또는 안심)을 하면서 협회에 전화를 걸어 호기롭게 “나는 아직 만으로는 40대이니 상대가 없으면 40대부로 대진표를 작성하여도 상관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틀 후 대진표가 나오고 상대의 소속 체육관과 이름을 볼 수 있었다. 도대체 상대 선수의 수준은 어느 정도나 될까? 인터넷을 열심히도 검색하였다. 스파링을 하는 상대는 체격과 체력이 좋아 보였고 그 체육관의 하드펀처로 소개되어 있었다.

나의 생활체육복생대회 데뷔전이야기

나이는 나보다 9살 정도 어린 것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갑자기 긴장이 몰려왔다. 모르는 게 약이었다.

대회 전날 78.8킬로그램으로 계체량을 통과하고 당일 관장의 격려를 받으면서 링에 올랐다. 그리 긴장은 되지 않았는데 관장이 몸을 풀어주면서 자꾸 긴장을 하지 말라고 하는 통에 오히려 긴장이 되었다. 공이 울리고 드디어 역사적인, 그러나 개인적인 1분 30초 2라운드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주먹을 맞대면서 상대방과 눈빛을 교환하였다. 헤드기어 사이로 보이는 상대의 눈빛은 전쟁터에 처음 나선 병사의 그것처럼 겁을 집어먹은 듯하였다. 아뿔싸! 이건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약간의 탐색전이 필요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상대는 공이 울린 후 10초도 안되어 잽과 스트레이트를 연속으로 뻗어왔는데 정통으로 맞고 어지러움을 느껴, 휘청하는 순간 심판은 카운트를 했다.

여덟까지인가를 센 후 나보고 괜찮냐고 물어보았다. 괜찮냐고? 당연히 괜찮지. 이 무슨 쪽팔림인가(참고:‘쪽팔리다’는 순우리말로서 ‘부끄러워 체면이 깎이다’를 의미함). 다시 자세를 가다듬었다.
가드를 올리라는 관장의 주문이 멀리서 들려 왔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잽을 던졌는데 상대방은 약세를 보았는지 거침없이 주먹을 휘두르며 들어왔다. 나의 라이트 스트레이트가 상대의 머리를 강타하고 어디선가 ‘그렇지’ 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둘은 주먹을 마구 휘둘러댔다. 복싱인지 개싸움인지~~. 격렬한 공방전 후 왼쪽 손목 부분에 상대의 목이 걸려 있길래 냅다 뿌리쳤다. 이번에는 상대가 캔버스에 쓰러졌다. 하지만 펀치에 의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운으로 인정될 수 없었다. 심판은 상대를 일으켜 세운 후 다시 싸움(?)을 붙였다. 잠시 가드를 내린 사이 상대방의 스트레이트가 또다시 나의 머리에 꽂혔다. 충격은 없었고 반격을 하려는 찰나 ‘스톱’, 심판의 소리가 천둥처럼 링에 울려 퍼졌다. 아니 스톱이라니 이게 무슨 소린가. 어리둥절하고 있는 사이에 심판은 두 손을 X자 모양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끝. 고개를 떨군 채 링에서 내려왔다.

관장한테 얼마나 미안하든지. 잠시 동안의 분석과 위로가 오간 다음 관장이 살며시 상장과 트로피를 건넸다. 대진표가 확정되고 나서 나이가 워낙 크게 차이가 난다고 협회에 항의했더니 경기 결과에 관계없이 나를 50대부-80킬로그램 우승자로 결정했다나 뭐래나. 관장은 덧붙였다. 가족들이 걱정 많이 할 테니 상장과 트로피를 챙겨 가시라고. 쪽팔림에 민망함까지 더해졌다. 관장은 내 성격을 몰라도 너무 몰랐으~~나, 상장과 트로피를 버릴 수도 없어 챙겨들고, 바로 우리법원 나민권, 최민영 실무관의 결혼식에 참석하였다. 이제 시나리오가 변경되었다. 나는 결과가 어떻게 됐느냐고 누가 묻기도 전에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져 버렸다고 자백했다. 아이들은 묻는다. 아빠, 졌다면서 어떻게 우승 상장을 타 왔어? 얘들아, 세상에는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 너무도 많단다.

실망을 심하게 한 나머지 이제 복싱을 그만둘까 생각하다가 이틀 후 체육관에 다시 나갔다. 관장이 촬영한 동영상을 보니 그리 졸전은 아니었다. 다시 힘을 얻었다. 나아가 진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아니 정신승리까지 하게 되었다. 또다시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이야기한다. 실전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보다 3배 정도는 힘들다고. 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링에 올라가 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덜들 마”어쨌든 나는 인생에서 두 번째로 그럴듯한 상대의 목덜미를 쥐어 보았다.

글_조 영 서울동부지방법원 총무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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