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순간들2] 부산 앞바다에서 극락왕생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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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5

부산앞바다에서극락왕생을꿈꾸다

부산 앞바다에서 극락왕생을 꿈꾸다
웹툰 ‘극락왕생’의 작가 ‘고사리박사’ 만난 이야기

글. 유현영 부장판사(부산동부지원)
이미지 출처: 웹툰 〈극락왕생〉, 딜리헙(dillyhub.com)

몇 년 전 친구로부터 웹툰 ‘극락왕생’을 추천받았습니다. 뭔가 싶어 찾아봤는데 사연 있는 귀신이 환생하여 지옥의 호법신 하나와 극락왕생을 도모한다는 그런저런 소개로 시작되어 첫 에피소드(1화는 무료였습니다)부터 머리 풀어헤친 귀신이 등장하더군요. 소스라치게 놀라 다시 들여다 볼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작년에 부산으로 발령 나면서 ‘극락왕생’ 배경지로 간다며 철없이 부러워하는 친구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이 웹툰을 다시 펼쳐보게 되었습니다. 결국 밤을 새워서 1부를 완독하게 되었죠(만약 보시게 된다면 중간에 멈추기 곤란하니 도시락과 간식, 물을 구비해두시고 가급적 휴일 아침에 시작하시기를 권해드립니다).

3부작인 이 이야기는 현재 1부가 완결되어 일부가 단행본으로 발간되었고, 문체부 장관상까지 수상하더니 저간의 인기에 힘입어 드라마까지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작가와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사실은 결말이 너무나 궁금하여) 만남을 요청드렸는데 흔쾌히 응해 주셨습니다. 결말은 전혀 알려주지 않으셨지만 추석 무렵 자택에서 작가의 고향이기도 한 부산 바다에 대한 이야기부터 작화의 배경, 법원의 역할까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극락왕생표지

다음은 작가(고사리박사)와의 일문일답입니다.

주인공인 ‘자언’이 귀신이 되어서도 그리워 한 부산 바다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자언이 환생해서 부산 바다 중 하필 달맞이 고개 앞바다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인가요.

수평선이야말로 부산 바다의 매력 같아요. 하늘과 바다가 하나가 되는 느낌이 듭니다. 달맞이 고개에서 바라본 바다는 시야가 탁 트여서 ‘아!’ 하게 되는 풍경이 있어요. 사람을 놀라게 하는 아름다움이 있죠. 자언이 서울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본 바다이기도 했는데, 다시 환생해서 눈을 떴을 때 그 장면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제가 부산에 살 때 제일 많이 갔었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바다입니다.

달맞이 고개에서 바라본 바다도 그렇지만, 해동용궁사 앞바다, 청사포 앞바다, 해운대 바다, 주요 등장인물들이 만나 마음을 드러내고 공감하고 서로를 통해 성장하고, 다음 국면으로 넘어가는 장소들로 부산 바다들이 등장하는데요. 각각의 바다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해동용궁사 앞바다는 딴 세계에 온 것 같은 몽환적인 아름다움이 있어요. 그래서 관음이 신을 불러내고, 신화적인 얘기가 나올 때 배경이 되었죠.

청사포 앞바다는 카페들도 있고 배도 많긴 한데 한적해서 생각이 많을 때 혼자 가기 좋아요, 문수가 처음으로 깊은 얘기를 털어놓은 곳, 자언이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얘기를 하는 곳이죠. 두 사람만 있을 수 있는 개인적인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라는 카페가 있는데 거기 루프탑 한번 꼭 가보세요.

해운대는 부산에서 제일 유명한 바다죠. 그런데 정작 해운대 사는 사람들은 여름에 해운대 안 가잖아요. 간다면 겨울밤에 가죠. 그 때 가면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없어요. 그게 좋더라고요. 해운대 모래사장을 걷는 장면이 한번은 등장해야 할 것 같았어요.

극락왕생 청사포

도명이 “나는 시험을 치면 잘 쳐야 돼.”라고 말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습니다. 완벽주의적인, 인정욕구가 강한 캐릭터를 설정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실수하게 되는 것 같아요. 타인의 인정을 좇다 보면 누구로부터 인정받고 싶은지, 내가 누구한테 인정받고 싶은지도 모르게 돼요. 중요한 건 나 자신의 인정, 자기승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여자들은 자라면서 주관적으로 자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힘들다 보니 나를 승인하기 위한 객관적인 지표를 자꾸 찾게 되죠. 시험이라든지, 합격증서, 자격증이라든지. 자기승인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도명의 완벽주의를 어떻게 풀어낼지 기대해주세요.

지옥도는 전생의 업을 평가해서 다음 생을 결정한다는 의미에서 법정의 모습도 떠올리게 합니다. 작가님이 생각하는 법질서, 법원의 역할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법은 기본적으로 공정해야겠죠.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도명이 귀신이 된 자언을 악귀라고 판단해서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하면서 “나 도명존자는 중생 일체를 공정히 제도하기로 다짐했다. 죄지은 자는 기필코 응보를 가려 윤회시킨다. 이게 내가 세우고자 하는 공정함이야.”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도명의 부하인 청국은 자언이가 정말 악한 귀신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죠. 도명은 환생한 자언과 함께 지내면서 공정함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도명의 이야기를 통해서 ‘공정함’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인간사회는 정말 다면적이어서 절대적이고 추상적인 공정함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정함은 무엇보다 구체적인 현실에 기반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법은 상처를 치유하고 사회의 가장 낮은 곳과도 소통해야 하겠죠. 지옥도 이후에 사람의 삶이 이어지는 것처럼 피해 이후에도 삶이 이어지니 법은 시시각각 변하는 사회보다 한발 먼저 앞서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강남역 살인사건이 계기가 된) 혜화역 시위에서의 분노가 이 이야기의 계기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당시의 경험을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혜화역 시위 당시 피해자와 비슷한 나이였어요. 늘 불안해하던 어떤 일이 현실이 되었고, 나 역시 언제든지 피해자가 될 수 있는데도 같은 일이 생겼을 때 사회의 일원으로 충분히 보호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끔찍하고 슬픈 순간이었는데 함께 모인 여성들을 보면서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느꼈어요. 잊지 못할 경험이었죠. 그게 극락왕생 작화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달맞이고개앞바다

가장 애정이 가는 캐릭터는 누구인가요.

민머리 캐릭터가 좋아요. 진짜 빨리 그리거든요. 탈코르셋이 만화가 복지에 도움이 됩니다(웃음). 반면 곱슬머리 캐릭터들이 제일 그리기 힘들어요. 특히 ‘문수’는 다크 써클도 그려야 하고 키도 크고, 덩치도 좋아서 그리기 힘들죠.

극락왕생의 등장인물은 단 1명(무독귀왕)을 제외하고 모두 여성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1명만을 남자로 설정한 이유가 있나요.

이질적인 존재(남성)가 하나 있으면 그 존재를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같은 존재(여성)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극락왕생’이라는 세계는 특이하게도 그런 세계인 것이죠.
지장 3존, 즉 지장, 도명, 무독귀왕 셋 중에서 지장과 도명의 관계가 특별하기 때문에 무독귀왕의 존재가 희미할 필요가 있기도 했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머리가 짧거나 몸집이 큰 캐릭터인 도명과 문수를 여자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더군요. 심지어 도명은 치마 교복을 입고 나오는데도 ‘왜 남자가 여자 교복을 입고 있지’라고 하시고요. 머리가 짧고 힘이 센 사람을 여자라고 상상하는 것보다 남자가 여자 교복을 입고 있다고 상상하는 게 더 편한 거죠.

극락왕생은 에피소드마다 달리는 댓글들도 수준이 높고 감동적이던데, 가장 기억에 남는 댓글을 소개해주세요.

‘비와 당신’ 편의 댓글들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가슴에 묻고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어요. 정말 예술이란 게 치유와 소통과 사랑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마지막으로(정말 궁금한데) 자언은 왜 죽었고, 파순의 정체는 무엇인가요.

파순은 2부에서 정말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캐릭터이고, 정말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재차) 2부를 기대해주세요.

해운대모래사장

한 편의 웹툰을 들여다보고 작가와 대화를 나누는 내내 이상하게도 오래되었지만 평생 잊을 수 없는 이야기가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대학교에 갓 입학한 무렵 어느 날 밤의 이야기입니다. 밤늦은 시간 들른 편의점에서 술 취한 한 아저씨가 시비를 걸어 왔어요. 기분 나쁘게 쳐다본다면서 난데없이 주먹을 휘둘렀고요.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던 그 순간, 정적을 뚫고 어떤 언니가 그 아저씨에게 달려들어 “아까부터 지켜봤는데 쟤가 뭘 잘못했기에 폭력을 행사하냐?”면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편의점 카운터 직원한테는 “당장 경찰에 신고해라”면서 을러댔고요. 그 아저씨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되지도 않는 변명을 하면서 사과를 하더군요. 그 언니는 제게 괜찮냐고 하면서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자리를 지켜주었고요.

그 뒤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이 이야기는 살아오면서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이야기를 만나게 했습니다. 어느 날 언덕길에서 구르던 차바퀴에 깔린 사람을 보고 지나가던 마을버스에 타고 있던 여고생 예닐곱 명이 가방을 집어 던지고 달려 나와 괴력을 발휘하여 차를 들어 올려 깔린 사람을 구하던 뉴스 영상에서, 늦은 밤 편의점에서 일하던 외국인 여성 알바생이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고함에 뒤도 안 돌아보고 뛰쳐나가 자기보다 몸집이 더 큰 가해자를 피해자와 함께 막아내던 영상에서 마주하기도 했죠.

아마도 자언과 도명이 인간세계와 지옥도에서 극락왕생을 도모하는 순간순간들이 수십 년 전 두려움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내밀었던 그 언니의 손과 무척 닮아있었나 봅니다. 그 손은 한 발짝 떼기도 두렵기만 한 세상에서 혼자가 아닐 수도 있다,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겠구나, 그것이 사람일 수도, 나를 둘러싼 질서일 수도 있겠다는 안도와 용기였죠. 그래서 그 기억들은 돌이킬 때마다 이 웹툰의 등장인물들처럼 ‘막막하다가도 웃음이 나게’ 합니다.

과연 자언은 다시 살게 된 세상에서 고통스러운 윤회를 마치고 극락왕생하게 될까요.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며 회유했지만 작가는 작품의 결말을 얘기해주지 않았습니다(본인도 아직 모를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도 저는 감히 이 이야기의 결론은 극락왕생 ‘성공’이라고 단언합니다. 왜냐하면 자언의 이야기가 고통과 상처에 대한 이야기면서 위안과 치유의 이야기이도 하듯이 윤회는 극락왕생의 한 부분일 수 있으니까요.

작가는 ‘삶에서 무엇을 기억하는지가 당신이 누구인지를 정한다’고 하던데, 이제 제게 부산 앞바다들은 누군가 내민 손을 잡고 극락왕생을 꿈꾸던 곳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겨울밤 해운대 모래사장을 걸으며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14화 ‘파도가 내게로 온다’ 참조), 해동용궁사 앞 몰아치는 파도 앞에서 콧물을 훌쩍이며 이 세상 어딘가에서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리고(5화 ‘용의 아이들’ 참조), 다시 찾게 될 달맞이 고개에서 그리운 인연들을 추억하면서요(1화 ‘당산역 귀신’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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