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순간들1] 슬기로운 감상생활

테마가 있는 글

2021.09.04

슬기로운 감상생활
어느 형사 법관의 플레이리스트

글. 김용찬 부장판사(대전지방법원)

“삶의 시름을 달래주는 두 가지, 그것은 음악과 고양이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내가 200% 공감하는 말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냥집사가 되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매일 동네 길냥이들 사료를 주거나 랜선집사를 하는 걸로 달래고 있지만, 음악이 주는 위로는 포기하지 않고 산다.
그리 큰 곡절 있는 인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의 상처들은 많았기에, 내게 음악이 없었다면 목숨줄을 놓치거나 최소한 정신줄은 놓지 않았을까 싶다.

대전지법에서 일한 지 4년 차인 지금은 신청단독 업무를 하고 있지만, 어쩌다 보니 처음 3년 동안 형사업무를 맡게 되었다(형사단독 겸 영장 1년, 형사합의 2년). 영혼 깊은 어딘가에서 시도 때도 없이 치고 올라오는 멜로디 속에 살던 중, 얼마 전 주말 아침 애청하는 라디오 프로에서, 청취자가 사연을 담아 신청한 ‘나만의 플레이리스트’ 몇 곡을 틀어주는 코너를 들었다. 순간, 형사사건을 맡으며 여러 상황에서 의식의 흐름대로 들었던 노래들을 한번 풀어 놓으면 어떨까 싶었다. 지극히 개취인 내 맘대로 리스트를 말이다.

카라, 루팡 카라, ‘루팡(Lupin)’:
유무죄가 고민되는 절도나 복잡한 재산 관련 사건에서
개인적으로 카라의 노래 중 최고로 꼽는 곡이다. 배경 사운드가 웅장하고 멜로디 라인도 훌륭하다. 안무도 물론 멋지고... “Hallo Hallo Hallo” 가사가 반복되어 나오는데 이게 참 중독성이 있다. 수능금지곡처럼 가끔 재판 중에 떠오르면 어깨 들썩임을 참느라 난감해지기도 한다.
‘루팡’을 들을 때마다 고인이 된 멤버 구하라의 안타까운 사연이 떠오른다.
연예인이 내는 세금을 ‘유명세’라고 한단다. 그렇다고 그 누구도 연예인이라는이유로 사람을 함부로 대하거나 구설에 올릴 자격은 없다. 많은 피해를 준 것도 모자라 한 젊은이에게 생명이라는 엄청난 세금까지 내도록 만든 우리의 성숙하지 못한 대중문화가 아쉽다. 세칭 그녀의 이름을 딴 법안이 입법 단계에 있는 것으로 안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었던 고인의 명복을 위해 화살기도를 올려 본다.
피해자가 많은 사기사건이나 복잡한 횡령, 조세 관련 사건에서 수많은 증인들을 신문해야 할 경우가 제법 있다(그러고 보면 지금 하는 신청업무의 가장 큰 장점은 증인신문이 없다는 것~^^; 덕분에 요즘 화가 많이 준 것 같다). 증인 한 명의 신문이 길어져서 서너 시간을 넘길 때도 있는데, 갈수록 처음의 집중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손에 꼭 쥔 작은 십자고상과 성모상도 무용지물이 된다. 정신은 조금씩 혼몽해 져서, 조카가 사발면을 먹으며 열여덟 가지 색깔 크레파스로 열 가지 장수 생물을 그리는 장면이 꿈처럼 스쳐갈 즈음, 다행히 신문이 끝난다. 15분 휴정을 고지하고 방으로 들어와서 가끔 듣는 노래가 ‘루팡’이다.

“… 겁먹지 마 니 심장소리가 들켜. 쉿! 뒤에 서서 침착하게 지켜봐 봐. 탐난다고 서두르단 결국 Game Set 유연하게 행동해 봐 As Usual It’s Mine …”

방탄소년단, 상남자 방탄소년단, ‘상남자(Boy In Luv)’:
어렵거나 황당한 당사자를 만났을 때
21세기의 비틀즈라 불리는 BTS(BTS가 Beatles에서 따온 이름 아니냐는 오해도있음)는 꼭 아미가 아니라도 누구나 좋아할 거다. 빌보드 차트를 씹어 먹고 있는 최근 곡들도 자주 듣고, 원래 청승맞은 발라드 곡들을 애정하는 편이라 ‘봄날’이나 ‘전하지 못한 진심’도 좋아한다. 그치만 BTS 곡 중 나의 원픽은 누가 뭐래도, 지금은 어엿한 청년이 된 일곱 소년들의 치기가 듬뿍 담긴, 어쩌면 조금 유치한 ‘상남자’다.
“되고파 너의 오빠 너의 사랑이 난 너무 고파”로 시작되는 인트로부터 노래 끝까지 가사의 라임이 애들 말로 정말 쩐다. 작사에 참여한 RM과 슈가는 정말 천재임을 인정~~! 이 친구들이 수백년 전에 태어났다면, 이백, 두보에게 싸다구 여러 번 날렸을 거다. 이 곡의 멋진 안무를 배워보는 게 내 버킷리스트 중에 있긴 한데, 죽기 전에 가능할지 모르겠다(ㅜㅜ).

형사사건을 하다 보면, 증인과 물증이 너무도 명백한데, 말이 되지 않는 주장을 하면서 모든 잘못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피고인이나, 피고인 자리에 앉아야 할 것 같은 황당한 피해자 증인이 있다. 가끔은, 법복 벗고 내려가 맞짱을 뜨기로 하고(드루와~ 드루와~), 선빵으로 입부터 날려주고 싶은 충동이 든다 (물론 내가 맞는 게 겁이 나서 시도는 못하고 있지만...). 차마 그렇게 못하는 스트레스를 이 곡으로 대리 해소한다고 할까? 노래 듣는 걸로 해소가 다 안 되면, 나는 어쩔 수 없이 판결 주문에서 상남자가 되곤 한다.

“… 꽉 잡아 날 덮치기 전에 내 맘이 널 놓치기 전에 Say what you want Say what you want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

악뮤, 어사널사 AKMU(악동뮤지션), ‘어. 사. 널. 사.’:
얽힌 남녀관계가 원인이 된 사건에서
제목이 좀 길어서 줄여 보았다. 원제는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 내 음원사이트(소원 들어주는 램프 요정)에서는 내가 많이 들었던 순서대로 곡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곡이 1위다(현재까지 총 211회 감상). 야근하는 날 구내식당에서 간단히 저녁을 한 후, 한밭수목원까지 혼자 산책 할 때 이 곡만 반복재생해서 듣던 때가 있었다.
다른 악뮤 곡들처럼 오빠인 이찬혁이 만들어 동생 이수현과 같이 부른 곡인 데, 가사도 멜로디도 너무나 아름다워 첫귀(?)에 반했다. 이수현의 맑고 서정적인, 깊은 감성이 담긴 목소리가 영혼의 찌든 때를 닦아주는 느낌이다. 그 나이에 어떻게 이런 감정을 노래에 담을 수 있을까?

연인이었던 남녀가 피고인과 피해자로 법정에 서는 경우가 있다(압도적 다수는 여성이 피해자다).
비극은 주로, 껍데기만 사랑으로 포장된 소유욕과 집착에서 시작된다. 남자들이 이렇게까지 찌질해 질 수 있는지 놀랄만한 사건이 많았다. 가사에서 뒤끝남의 절정을 보여준 윤종신의 ‘좋니’가 남자들에게 그렇게까지 인기를 끈 것을 보면, 어쩌면 찌질함은 남자들의 못된 본성인가 싶다. 나도 물론이고 공감 능력이 부족한 모든 남자들은 각성할 필요가 있다. 잘못하면 ‘상남자’를 듣고 난 어느 판사 앞에 서서, 낭독되는 무서운 주문을 듣게 될지 모른다.
어느 소설가는 딸에게, 잘 헤어질 수 있는 사람과 연애하라고 했다는데, 문제는 연애 시작 전에는 그걸 알아보는 게 쉽지 않다는 것... 얼마 전 공포되어 10월부터 시행되는 스‘ 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 고통받는 많은 피해자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

“… 어떻게 내가 어떻게 너를 이후에 우리 바다처럼 깊은 사랑이 다 마를 때까지 기다리는 게 이별일 텐데 …”

손디아, 어른 Sondia(손디아), '어른':
나이 어린 피해자나 피고인을 만났을 때
나의 넘버 투 인생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메인 OST이다. 가수의 목소리가 아이유와 비슷해서 처음에 여주인공이 직접 부른 노래인줄 알았다. 많은 이들이 이 드라마를 이지은 최고의 연기로 꼽고 있고,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선균이 연기한 박동훈과 같은 어른이 되고 싶도록 만든 드라마였다(이 드라마에 대해서는 법원사람들 지난 2021년 6월호 중 청주지방법원 이무룡, 이종인 판사님의 글 참조... “이종인 판사님, 좋은 글로 다시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지난 2년간 저희 재판부에서 국선변호 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워낙 훌륭하신 분이니 법원생활 내내 편안함에 이르실 것을 믿습니다~” ).

거친 환경 때문에, 나쁜 어른들 때문에, 상처 주고 상처받으며 자란 수많은 아이들이 피해자가 되고, 피고인이 되어 법정에 선다. 때론 어린 피고인의 황당한 변명에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그들을 범죄로 몰고간 어른들 중 하나가 나라는 생각에 미안해지기도 한다.
형사 합의사건 중 50% 이상이 성폭력사건이고, 많은 피해자가 어린 여성이다. 상당 수 피고인이 공소사실을 다투고, 결국 적지 않은 피해자는 증인석에 앉아 수많은 질문의 칼날 앞에서 다시 한번 상처 입는다. 친족 성폭행사건의 경우, 피고인뿐 아니라 가까운 가족들조차 칼잡이로 나서는 경우가 허다하고, 피해자는 칼끝에 서서 안간힘을 다해 버틴다. 증언하며 울먹이는 어린 피해자를 볼 때마다, 법대에서 내려가 머리라도 쓰담쓰담해 주고 싶다. 그러나 공정함과 냉정함의 유지라는 핑계 아래 내가 겨우 할 수 있는건, ‘지금까지 일어난 그 어떤 일들도 증인의 탓이 아니니, 자책하지 않길 바란다’는 한두 마디 말뿐... 와락 떨어지는 피해자의 눈물은 촛농처럼 내 심장에 떨어지고, 무너지는 마음을 가누기가 쉽지 않다. 2년간의 성폭력 전담부 경험은 거의 모든 형태의 페미니즘을 긍정하게 만들었다.

손디아의 ‘어른’은 한편으로, 여전히 낯설고 어색한 세상이 두려운, 내 안에 숨어 있는 아이를 생각나게 한다. 어느 배우의 말처럼, 나는 늘 내 나이를 처음 살아 본다. 오늘은, 내 남은 인생 중 가장 어린 날이다.
어쩌면 이 곡은 지친 아이를 품고 사는 모든 어른들을 향한 위로일 수도 있겠다.

"고단한 하루 끝에 떨구는 눈물. 난 어디를 향해 가는 걸까. 아플 만큼 아팠다 생각했는데 아직도 한참 남은 건가 봐. 이 넓은 세상에 혼자인 것처럼 아무도 내 맘을 보려 하지 않고. 아무도…"

크러쉬, beautiful Crush(크러쉬), ‘Beautiful’:
재판 마친 후 퇴근길의 차 안에서
나의 넘버 원 인생드라마 <도깨비>의 OST이다. 다섯 번을 넘게 보고도, 촬영지인 퀘벡을 내 눈으로 보고 싶어서 캐나다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만들었던 드라마다. 주옥같은 여러 명대사가 있는데, 나는 이 대사가 특히 와닿았다.
“누구의 인생이건 신이 머물다 가는 순간이 있다. 당신이 세상에서 멀어지고 있을 때 누군가 세상 쪽으로 등을 떠밀어 주었다면, 그건 신이 당신 곁에 머물다 가는 순간이다.”
멍때리기 대회에서 일등을 한 재미있는 힙합 가수 정도로만 알고 있던 Crush가이 정도의 감미로운 노래를 할 수 있다니 놀라웠다. 여러 번 따라 불러 보아도 그 느낌을 살리기가 상당히 어려운 곡이다. 제목과 멜로디는 아름다운데, 정작 가사 내용은 쓸쓸하고 슬프다.
재판이 늦게 끝난 날, 너덜해진 몸과 마음을 차량 운전석에 내던지듯 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노래를 들으며 가끔 생각했다. 수많은 어둠에 둘러싸인 이 세상은 정말 아름다운 곳인가? 정답은 없는 질문일 거다. 그저, 나를 감싼 어둠을 해결하는 방법은 그 어둠과 싸운다고 기를 쓸 게 아니라, 문을 열고 작은 빛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말을 믿을 수밖에...
내 어둠에 빛을 줄 문은 뭘까? 차 문을 닫고 집에 들어갈 때 무심코 화단에서 수수꽃다리 향기가 날 때, 한밭수목원 산책길에서 잡은 아내 손의 감촉이 유난히 정겨울 때, 새로 산 기타에서 제법 맑은 소리가 날 때, 좋아서 흥얼거리고 있는 바로 그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올 때, 사료통 들고 가는 나를 반기는 삼색 길냥이와 눈이 마주칠 때, 아마도 바로 그때 문이 열리는 것 같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의 문을 찾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