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발견1] 영화 <증인> 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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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06

영화 <증인> 감상문

글. 이민형 판사(사법정책연구원)

나는 자폐가 있으니까 변호사가 되지는 못할 거야. 하지만 증인은 될 수 있어.
증인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려 주고 싶어.

영화 <증인>은 한적한 주택가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을 두고 용의자로 지목된 가사도우미가 결백을 주장하는 가운데 열린 형사재판을 소재로 다룬다. 뚜렷한 살인의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고 피고인은 무죄를 주장하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황에서 유일한 목격자인 ‘지우’의 진술은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재판 결과를 결정짓는 핵심 증거로써 모두의 주목을 받게 된다. 예상치 못한 변수는 지우가 자폐성 장애를 가진 여고생이라는 사실이다. 자폐성 장애(autism)는 정신의학적으로 ‘의사소통의 문제와 제한적이고 반복적인 행동의 특징을 보이는 발달장애’로 분류 된다.
대부분의 신체적·정신적 장애를 언급할 때면 장애인에 대한 사회 일반의 선입견과 그로 인한 보이지 않는 차별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차이를 곧 우열로 인지하는 자연법칙에 따른 본성으로 이해될 수도 있겠으나, 그만큼 대다수 ‘비장애인’의 시각에서 볼 때 겉보기에 다른 신체 구조나 이상 행동에 대한 무의식적인 무시, 차별, 배제의 집단적 심리는 인류 역사의 오래전부터 곳곳에 팽배해 있다.
신체적 장애에 대하여는 근대사회를 거치며 교육을 통한 인식 개선과 제도의 정비를 통해 상당 부분 사회적 차원의 수용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자폐와 같은 정신적 장애에 대하여는 여전히 사고방식이 특이하고 기이한 행동을 동반하여 정상적으로 사회활동을 수행하기 곤란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한 듯하다. 더욱이 형사재판이란 죄를 지은 사람으로 지목된 피고인을 법정에 세워 객관적 증거와 관련자들의 진술을 바탕으로 유무죄를 가리고, 유죄로 인정된 피고인의 형량을 정하는 절차로써, 그 의미와 영향력을 놓고 볼 때 사회에서 기능하는 여러 제도 중에서도 가장 신중하고 객관적인 판단과 심리를 요하는 것이다. 한 사람에게 살인자의 낙인을 찍는 재판에서 과연 자폐성 장애를 가진 유일한 목격자의 말을 어디까지, 얼마만큼 믿을 수 있는지 도대체 자폐란 무엇이기에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남들과 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인지, 겉보기에 그저 특이하기만 한 자폐 여고생의 마음속에는 우리의 편견에 가려진 어떠한 진심이 담겨있는지 영화 <증인>은 여러 가지 물음을 담은 채 이야기를 시작한다.
지우는 건너편 집의 유리창이 깨지고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인 장면을 목격한다. 가사 도우미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 순호는 무죄 주장의 근거로 팔순 노인의 단순 자살 사건이라는 변론 방향을 잡고서 목격자 지우에게서 그에 맞는 유리한 증언을 이끌어 내려 한다. 이에 맞선 검사는 가사 도우미의 행동이 자살한 노인에 대한 구조 활동이 아닌 살인의 고의를 가지고 살아 있는 노인과 다투다가 사망의 결과를 야기한 공격 행위였다고 주장한다. 양측의 주장이 맹렬히 맞서는 지점은 자살 또는 살인이라는 상반된 의미의 행동이고, 이는 곧 지우가 목격한 건너편 집에 소란이 발생한 당시 상황에서 가사도우미가 보인 행동의 구체적 묘사와 이에 대한 객관적 판단에 따라 결론을 달리하게 된다. 여기서 드는 의문점은 자폐성 장애의 증상과 특성이 무엇이기에 영화 <증인> 속에서 자폐성 장애를 가진 지우의 법정 증언에 대한 신빙성 논란이 발생하는가이다.

자폐성 장애는 흔히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사람으로 단순하게 이해되는데 주요한 특징 내지 증상으로 크게 세 가지가 제시된다.
첫째,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현저한 장애가 있고 대인관계를 형성하는 데 어려움이 생긴다. 이는 감정의 표현을 거부하는 것과 더불어 상대방 감정을 공감하는 데 곤란을 겪기 때문이다. 둘째, 언어적 발달이 지연되거나 괴상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의사소통에 장애가 생긴다. 자폐성 장애는 일반적으로 언어발달의 지연과 비언어적 의사소통의 곤란함을 수반한다고 알려져 있다. 셋째, 제한적이고 반복적인 관심과 행동을 보이고, 특이하고 비효율적인 집착이 있다.

영화 속 지우에게서 이러한 자폐성 장애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사회적 상호작용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고등학생 지우는 겉보기에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외부와 제대로 된 소통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일반인의 시각으로 보면 불필요한 행동, 예컨대 말을 하는 도중에 나온 노래 가사에 빠져 뜬금없이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귀에 익숙한 대사를 따라 하면서 대화를 중단하는 것 그리고 처음 변호사 순호를 만나는 장면에서 변호사 명함을 받아 들고 대뜸 “알파고 시대에 변호사는 사라질 직업 중에 하나”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이러한 자폐의 특징이 확인된다. 이와 같은 자폐성 장애의 특성은 영화 <증인>의 이야기 전개에서 긴장을 불러일으키면서 자폐성 장애를 대하는 사회적 시선과 자폐아가 겪게 되는 부조리의 단면을 들춰내며 중요한 흐름을 이어 가도록 한다.
지우는 순호의 계속된 부탁으로 어렵게 1심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 자신이 목격한 노인과 가사도우미의 몸싸움 장면을 묘사하고 가사도우미의 웃는 표정을 떠올리며 공격성을 보였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자폐성 장애를 신경의학적 질환으로 다루는 학문적 영역에서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의도적 행동과 우연적 행동을 구별하는 능력이 부족해 쉽게 오판에 이를 수 있다’라는 편견에 막혀 목격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하지 못한 채 오인 또는 착각하였을 가능성을 이유로 그 증언의 증명력이 떨어진다고 보고, 그 결과 피고인은 1심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선고받게 된다.
한편 언어적 소통 능력의 측면에서 볼 때 지우는 언어적 의사소통에서 별다른 제약을 보이지는 않는다. 이에 대한 해석으로 지우의 자폐 증상은 광범위한 발달장애에서의 자폐범주성장애(autism spectrum disorder)로서 기존에 아스퍼거 증후군으로 분류되던 고기능성 자폐의 일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스퍼거 증후군의 경우, 사회적 상호작용과 제한적이고 반복적인 행동 특성은 자폐성 장애와 동일한 반면 언어적 의사소통에 있어서는 별다른 결함이 발견되지 않는 특징을 보인다. 지우의 장애를 아스퍼거 증후군으로 진단하더라도 현재의 분류 기준상 아스퍼거 증후군은 자폐범주성장애에 포함되고 실제 증상에 있어서도 언어적 장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특성을 제외하고 다른 증상들은 일반적인 자폐성 장애와 동일하며, 자폐성 장애의 본질은 사회적 장애이고 언어의 지연 여부는 그로 인해 나타나는 결과 중 하나로써의 의미만 있다고 볼 때, 지우가 신경정신의학적 의미에서 자폐 증상을 가졌다고 보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처럼 자폐 증상의 범위가 넓고 의사소통에 별다른 제약이 없는 경우 또한 존재함에도 영화 속 인물들은 자폐라는 단어에 매몰되어 지우가 보여 준 아무런 문제가 없는 언어적 의사소통조차 정신병을 앓는 여고생의 믿을 수 없는 말로 쉽게 치부해 버린다.

제한된 관심과 반복 행동의 측면에서 보면, 영화의 초반부에서 순호가 자신의 세계에 빠져 살아가는 자폐아 지우의 마음을 열고 소통하기 위해 자폐아들이 흔히 관심을 갖는 퀴즈와 퍼즐 맞히기로 공통의 관심사를 키워 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순호에게 지우는 여러 색깔의 젤리 중 파란색 젤리만 골라 먹는 모습을 보인다.
특정한 대상을 향한 관심과 집중의 특징은 영화 후반부에서 반전을 이루는 소재로 작용한다. 무죄판결에 검사가 불복하며 시작된 항소심 재판에서 지우는 다시 한번 증언을 하게 된다.
그 자리에서 지우는 자폐아로서 지니게 된 태생적 특성, 즉 소리와 같은 외부적 자극에 남들보다 민감하고, 비상한 기억력과 숫자에 대한 탁월한 감각을 가졌다는 점을 보여 주고 사건 당시에 목격한 장면을 생생한 언어로 재현하며 1심 재판에서의 증언에 대한 ‘자폐아가 지닌 한계에서 비롯된 이해력과 전달력이 부족한 오판’이라는 평가를 ‘특수한 재능으로 남들이 보지 못한 사실까지 세심하게 목격한 순도 높은 정확한 증언’으로 역전시킨다.
영화 <증인>은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이해와 포용의 이야기, 진실을 향해 다가가는 좋은 사람들의 이야기, 눈앞의 부족함 너머에 존재하는 특별한 재능에 관한 이야기이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에 대한 지우의 질문이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다”로 매듭지어지며, 그저 괴상해 보이는 한 소녀의 행동 속에 누구보다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이 담겨있음을 떠올려 본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이 인색한 편견에 빠져 우열과 차별의 언어로 상처 주는 것에서 벗어나 하루하루 스스로를 사랑하고 그만큼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갖고 진정으로 소통하는 세상이 되길, 영화가 끝나는 순간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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