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 나의 삶2] 법원의 푸른 피, 우리는 실무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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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4

법원의 푸른 피,
우리는 실무관입니다

글. 김인철 실무관(상주지원)

안녕하십니까. 저는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원 형사단독 재판부에서 일하고 있는 김인철 실무관입니다. 정식발령을 받아 일한 지 아직 1년도 안 된 햇병아리이지만 친절 의무와 품위 유지 의무를 수시로 위반하고 있는 골칫덩어리 신규입니다. 글 솜씨가 좋지도 않고 아무도 안 궁금해하시지만 제가 법원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실무관으로 일하면서 겪은 경험과 느낀 감정들을 솔직 담백하게 써보겠습니다.
저는 1987년생으로 다소 늦은 나이에 법원에 들어왔습니다. 바라던 바는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취업이 늦어지게 되었고 30대가 되고 나니 마음이 조급해져 그냥 ‘직장인’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선택한 것이 국가직 교정직 시험이었고 운이 좋게 한 번에 합격했습니다. 법무연수원에서의 생활은 정말 즐거웠지만 불현듯 나이에 쫓겨 너무 급하게 이 길을 선택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연수원 생활이 끝날 때까지 고민을 계속하다가 결국 법원직 시험을 준비하기로 결심했고 교도소에서 근무한 지 한 달 만에 의원면직을 하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 길고 힘들었던 교도관 임용 과정을 다 거쳤는데 서른이 넘어 다시 무직자로 돌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자신이 있었고 어머니와 여동생도 저를 믿어줬기에 과감하게 결단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같이 교육받으면서 정들었던 동기들과 친동생처럼 잘 챙겨주신 교도관 선배님들을 배신했다는 사실, 그리고 저 때문에 그들이 감정적으로 동요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에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그런 생각을 길게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추위가 완전히 가시지 않아 쌀쌀했던 3월 초순의 어느 날, 긴장되는 마음으로 법원직 필기시험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그날은 저희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기도 합니다. 전부터 위독하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시험이 끝나고 큰어머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을 때 왠지 받기가 두려웠습니다. 할아버지는 늘 당신보다 제가 우선이었고 눈을 감으실 때까지도 제 걱정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살아 계실 때 사회인으로서 제대로 자리 잡은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고 죄송스럽습니다. 저는 지금도 제가 법원직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은 할아버지가 도와주셨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따뜻한 봄날에 교육원에서 마음 잘 맞는 동기들을 만나 너무나도 행복한 날을 보냈습니다. 처음에는 길어 보였던 교육원 일정이 순식간에 지나가버렸고 저희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다시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교육원을 수료하고 나서 몇 달이 지난 후 경주지원 등기계에서 대체근무를 할 기회를 얻었고 감사한 마음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올해 1월에 교육원 동기들이 발령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들을 축하해주며 저는 아쉽지만, 다시 기다림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올해 2월, 긴 기다림 끝에 마침내 상주지원 형사단독 재판부에 발령을 받았습니다. 상주는 한 번도 와본 적 없고 곶감이 특산물이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전혀 없는 낯선 땅이었지만 정식으로 출근할 직장이 생겼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했습니다. 물론 첫째 주 월요일까지만.

실무관은 정말 정신없이 움직여야 했습니다. 큰 법원에 비하면 일이 많은 건 아니지만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쌓여있을 때에 하필 민원인들의 전화가 끊이지 않습니다. 저는 제 명의로 된 문서나 도장도 없는 실무관일 뿐인데 가끔씩 만나는 화난 민원인들의 화살은 늘 저를 향해 있습니다. 애당초 싸울 준비를 하고 전화를 거는 민원인들은 처음부터 느낌이 오기 때문에 준비한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싸워드릴까 생각해봤지만 그래도 저는 국민을 받들어야 하는 공무원이기에 꾹 참습니다. 제 책상이 깨끗한 꼴을 못 보겠다는 건지 피고인들의 문건은 끝도 없이 들어옵니다. 대부분은 반성 없는 반성문과 의견 없는 의견서들입니다. 얇은 문건이나 기록들은 어쩜 그렇게 잘 숨는지 매일매일 지겨운 숨바꼭질을 합니다.

한창 성장기인 데다가 감수성이 풍부한 30대라 먹고 싶은 음식도 많고 입고 싶은 옷도 많지만, 실무관의 월급으로는 포기해야 하는 것이 참 많습니다. 딱히 사치를 부리는 것도 아닌데 통장 잔액은 좀처럼 늘지가 않습니다.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보이스피싱이라도 당한 건가 궁금해서 꼼꼼하게 통장 조회를 해보기도 합니다. 재판이 있는 날은 멋있게 정장을 차려입고 출근하지만 퇴근하면 추리닝, 슬리퍼 차림으로 분식집에서 김밥을 사 먹습니다. 얇은 지갑으로 생활하다 보니 고무장갑 하나 사는 데에도 30분 이상 비교하고 고민하는 살림꾼이 되었습니다. 요즘 인터넷에는 개인정보를 제공하면 마일리지를 주는 경우가 많은데 이미 제 휴대폰 번호는 공공재가 되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실무관은 참으로 고되고 배고픕니다. 하지만 그래도 쓰러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저희는 젊음의 상징이자 젊음이 무기인 실무관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청년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에는 저 역시도 전혀 공감하지 못하지만 아픔을 가장 잘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젊고 강한 저희 실무관 세대일 것입니다. 갓 입대한 훈련병들은 계급장 한 줄짜리 이등병조차 부러워하지만, 막상 이등병이 되고 나면 훈련병 시절을 그리워합니다. 실무관으로 일하고 있는 지금이 때로는 힘들기도 하지만 언젠가는 그리워질 날도 있을 것입니다. 모르는 게 많고 실수를 하더라도 용서받을 수 있는 것도 오직 실무관일 때뿐입니다. 실무관으로 보내는 10년의 세월은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길어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는 겪어볼 수 없는, 추억으로만 남겨야 하는 순간이기에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법원의 모든 실무관님들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실무관님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드리기 위해 감히 반말로 화이팅 한 번 외쳐보고자 합니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권상우의 명대사를 살짝 바꾼 멘트를 끝으로 이 글을 마치겠습니다.

“대한민국 법원 실무관들 힘내라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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