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멋진 날] 자연과 물아일체를 느끼는 풍월주인을 꿈꾸다

테마법원

2020.05.07

도시농부

자연과 물아일체(物我一體)를 느끼는 풍월주인(風月主人)을 꿈꾸다

서울동부지방법원 동호회 ‘도시 농부’

흔히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땀을 흘리고 정성을 쏟은 만큼 결과를 보여주기 때문이리라. 빌딩 숲 사이에서 소박하게 땅을 일구며 각자의 ‘작은 숲’을 만들고자 모인 서울동부지방법원 ‘도시 농부’ 동호회 회원들 또한 그 땀방울의 진심을 믿는다. 작은 씨앗이 푸릇하게 자라나 수확할 때까지 정성껏 공을 들이고 그 과정에서 보람을 찾고자 한다. 기대와 설렘으로 첫 삽을 뜬, 도시 농부들의 그 시작을 여기 소개한다.

글. 노초롱 + 사진. 이정도

자연 그대로를 사랑하는 사람들
서울동부지방법원 청사 4층 옥상에 모인 ‘도시 농부’ 동호회 회원들은 모이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삽과 호미를 챙겨 흙을 일구기 시작했다. 네모나게 마련된 작은 플랜트에는 아직 상추가 대부분이지만 곧 이곳에 여러 작물들이 푸릇푸릇하게 자라날 것이라며 기대에 부푼 모습이었다.
“부산고등법원으로 가신 장영수 사무국장님께서 지난해 봄에 텃밭 아이디어를 주셔서 플랜트 30개를 구입하고, 자가 농법을 이용해 친환경 텃밭을 가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선호도를 조사해서 개인별로 재배할 수 있도록 나눠드렸는데, 이를 보다 책임감 있게 관리하면 좋겠다 싶어서 동호회를 만들게 됐습니다.”
‘도시 농부’의 총무를 맡은 이훈 행정관이 올해 3월부터 시작된 동호회를 소개했다. 지난해 싹을 틔운 작물들은 여름과 가을을 지나면서 수확의 기쁨을 안겨주었단다. 각종 채소류와 방울토마토, 고추와 호박이 싱그럽게 열리면서 진심과 정성이 통하는 자연의 이치와 재미를 깨닫게 된 것이다. 올해부터는 그와 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도시 농부’라는 이름하에 보다 체계적인 운영과 홍보가 병행될 예정이다. 더 많은 직원이 옥상 텃밭의 가치를 알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사실 수도권에서 텃밭을 가진 법원이 결코 흔하지 않죠. 빌딩 숲에 이렇듯 존재하는 천혜의 환경(?)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어요. 동호회 회장님이신 박홍신 등기국장님께 건의드렸더니 흔쾌히 앞장 서서 많은 회원을 모을 수 있도록 다양한 조언과 노하우를 전수해 주셨습니다.”
이훈 행정관과 함께 총무직을 맡은 홍성칠 행정관이 덧붙여 소개했다. 이어 두 사람이 동호회의 목표와 목적에 대해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지향하는 삶’이라고 입을 모은다.
“조선 시대 문인 정극인의 <상춘곡>을 모티브로 삼아 자연과 물아일체(物我一體)를 느끼고 ‘풍월주인(風月主人)’이 되고 싶은 작은 열망에서 시작된 동호회”라고 갈무리한다.
과연, 자연을 가꾸고 그 가치를 사랑하는 사람들다운 시적 표현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소나무와 대나무가 울창한 속에서 자연의 주인이 되어 살고 있노라.
엊그제 겨울이 지나고 새봄이 돌아오니,?
복숭아꽃과 살구꽃은 석양 속에 피어있고,
푸른 버드나무와 향기로운 풀은 가랑비 속에 푸르구나.
칼로 마름질해 내었는가, 붓으로 그려 내었는가?
조물주의 신비로운 재주가 사물마다
야단스럽구나.
수풀에서 우는 새는 봄기운을 끝내 못 이겨
소리마다 교태로구나.
자연과 내가 한몸이 되니, 흥겨움이 다르겠는가?
- 정극인의 <상춘곡> -

자연을 벗 삼아 힐링하는 시간
‘도시 농부’는 동호회 회장인 박홍신 등기국장을 필두로 2명의 두 총무와 1명의 부총무로 구성돼 총 22명의 회원이 함께하고 있다. 현재는 동호회 가입을 마감했지만 앞으로 적극적인 홍보와 활동을 통해 가입을 희망하는 회원들이 늘어날 것이라며 자신감을 드려냈다.
오늘 자리에 동석한 정보름 실무관 또한 전 직원에게 보낸 ‘도시 농부’ 홍보 메일을 보고 가입했다고 하니 텃밭이 풍성해지는 만큼 회원 수 또한 금세 채워질 것만 같다.
“메일을 봤을 때 ‘도시 농부’라는 동호회 이름이 귀여워서 먼저 관심이 생겼어요. 제가 서울에서만 자라서 농사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보니 도전해 보고 싶었고, 무엇보다 업무로 힘들 때 햇빛을 보면서 새싹이 자라는 걸 보면 힐링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들어오게 됐습니다.”
방울토마토와 수박을 키워보고 싶다는 정보름 실무관은 특히 수박에 본인의 이름을 따서 ‘보름달’이라는 애칭을 지어주고 매일 와서 부지런하게 물을 주며 살펴보겠다고 덧붙였다.
동호회 회원들에게 주어진 플랜트의 양 끝단에는 상추와 고추를 심고 나머지 가운데 부분에는 각자가 원하는 작물을 심을 예정인데, 비록 한 평 남짓 되는 작은 공간이지만 충분히 마음을 쏟으면 그만큼 여러 작물이 쑥쑥 잘 자란다고 한다.
“지난해를 돌아봤을 때 상추와 토마토는 물론, 옥수수도 30개 정도 나왔어요. 올해에는 열무랑 알타리, 배추까지 해서 나중에 김치를 담가볼까 합니다.”
홍성칠 행정관의 머릿속에는 벌써 어느 공간에 어떤 작물을 심을지, 수확한 이후에는 어떻게 활용할지까지 이미 계획이 다 있었다. 이에 질세라 이훈 행정관도 쑥갓과 치커리를 심기 위해 비워 둔 자리를 보여주며 “아직은 냉해 때문에 씨앗을 뿌리기 이르지만 곧 본격적으로 고추부터 가지까지 다양한 작물을 골고루 심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도시농부

일상 속의 ‘리틀 포레스트’가 주는 안식
얼핏 보면 플랜트에 상추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냥 상추가 아니라는 ‘도시 농부’ 회원들. 적상추, 청상추, 겨자상추, 홍갓, 청겨자 등 상추만 해도 여러 종류가 자라나고 있었던 것. 여기에 조금만 시야를 넓혀 둘러보면 부추, 삼채, 돌미나리, 보리 등 옥상 곳곳에서 반가운 생명력을 마주할 수 있었다.
“잘 길러서 동호회 회원들이 서로 기른 작물을 나눠주며 품앗이도 하고, 날이 좋은 날에는 부추 부침개도 해먹을 생각입니다. 동호회 회원뿐만 아니라 관심 있는 분들도 같이 오셔서 뜻깊은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도시 농부’의 즐거움을 여러 행사를 통해 알리고 더 많은 분이 함께 할 수 있길 바랍니다.”
이훈 행정관은 코로나19 사태가 종식되고 사회적 거리 두기가 끝나면 옥상을 벗어나 서울 근교로 활동 반경을 넓힐 계획도 밝혔다. 경기도 광주, 양평 등 좀 더 넓은 땅으로 찾아가 농사를 배우는 것은 물론, 봉사활동을 하며 친목을 나누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란다.
“빌딩이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아요. 이전에 주말농장을 해봤는데 한 주만 안 가도 풀이 무성하거든요. 여기는 점심시간에 조금만 짬을 내면 얼마든지 농사를 지을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죠. 사실 딱 이 정도 사이즈가 적당하거든요. 조금만 넓어도 부담스러워요. 정성을 들여 가꾸기에 충분한 공간이에요.”
홍성칠 행정관이 플랜트에 물을 주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박홍신 등기국장은 주말농장의 경험을 보태며 옥상 텃밭의 장점을 거들었다.
그 말처럼 가까이에서 자연을 벗 삼아 소박한 행복을 짓는 ‘도시 농부’ 회원들에게서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메시지를 엿볼 수 있었다. 직접 키운 농작물로 소중한 한 끼를 나누는 주인공처럼 ‘도시 농부’ 회원들 또한 자신만의 ‘작은 숲’에서 자연과 교감하며 수확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마음 역시 풍성하게 채워질 테니 시나브로 ‘도시 농부’의 목표 달성이 머지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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