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심의관 코너] 어문 규범에도 유효기간이 있나요?

조사심의관 코너

2022.10.06

세종대왕 조사심의관 코너 글 윤민 조사심의관(법원도서관)

어문 규범에도 유효기간이 있나요?

지난 8월 6일 광화문 광장이 재개장했습니다. 면적이 2배 이상 넓어지고 다양한 실내외 전시공간과 함께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돌아왔지만, 상징과 같은 세종대왕 동상은 지금도 굳건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10월은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를 기념하는 한글날이 있는 달인데요. 1926년 ‘가갸날’로 시작되어 1928년 ‘한글날’로 개칭되었고, 광복 후 10월 9일로 확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번 조사심의관 코너는 우리 ‘말’과 이를 담아내기 위해 만든 ‘글자’인 한글, 그리고 그에 관한 규칙인 ‘어문 규범’의 변화에 관하여 잠깐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법과 사뻡
한글은 그 어떤 문자보다 소리를 쉽게 표현하는 문자입니다. 한글 맞춤법 역시 표준어를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합니다(한글 맞춤법 제1항). ‘구름, 하늘’과 같이 발음하는 그대로 표기하는 경우는 소리와 표기가 일치하지만, ‘놀이, 얼음’과 같이 뜻을 파악하기 쉽도록 각 형태소의 본 모양을 밝혀 적게 되면 소리와 표기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최근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도 한글 발음이 소재가 되었습니다. “사법이 아니라 사뻡, 공법이 아니라 공뻡”이었는데요. 어떤 문제에 대하여 법을 적용하여 적법성과 권리관계를 확정하여 선언하는 일인 ‘사법(司法)’은 술어와 목적어로 구성된 한자어이기 때문에 표준 발음이 [사법]이 됩니다. 그렇지만 개인 사이의 재산, 신분 등에 관한 법률관계를 규정하는 ‘사법’(私法)의 표준 발음은 [사뻡]이고, 그에 대응되는 ‘공법’(公法)의 표준 발음은 [공뻡]입니다.
‘불법’, ‘탈법’의 표준 발음도 [불법/불뻡], [탈뻡]입니다. 표준발음법 제26항에 따르면, 한자어에서 ‘ㄹ’ 받침 뒤에 연결되는 ‘ㄷ, ㅅ, ㅈ’은 된소리로 발음합니다. ‘ㄹ’ 받침 뒤에 연결되는 ‘ㅂ’은 몇 개의 예외가 있어 규정에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된소리로 발음하게 됩니다.

우리의 발음이 표준어를 바꾼다?
발음은 ‘의미 전달’이라는 기본적인 역할과 함께, 듣는 사람의 ‘몰입’ 정도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리고 발음의 정확성을 좌우하는 것 중 하나는 ‘입술의 모양’입니다. 대체로 입술의 움직임이 작으면 한국어를 정확히 발음하기 어렵습니다. 각각의 모음마다 고유의 입 모양이 있는데 하나의 입 모양으로 모든 모음을 표현하다 보니 발음이 뭉개지고 웅얼거리는 것처럼 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입술을 모으고 벌릴 때 보다 확실하게!’라는 원칙만 지켜도 한국어 발음은 상당히 정확해질 수 있다고 합니다.

물론 사람들의 발음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합니다. 이러한 발음의 변화는 표준어를 사정(査定)할 때에도 고려됩니다. 발음 변화에 따라 표준어를 곧바로 바꾸지는 않지만, 변화의 정도가 심하거나 발음이 변한 지 오래되어 대부분의 언중이 바뀐 발음으로 말하는 경우 표준어를 새로이 정하게 됩니다.
그 대표적 예가 ‘짜장면’입니다. 2011년 8월 국립국어원에서 ‘짜장면’도 표준어로 인정하여 현재는 ‘자장면’과 ‘짜장면’이 모두 표준어입니다.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zh’는 ‘ㅈ’으로 적으므로 ‘자장면’(zhajiangmian, 炸醬麵)으로 적어야 하지만, 언중이 ‘짜장면’으로 발음하고 그 표기 형태도 널리 쓰이기 때문에 복수 표준어로 인정한 것입니다.
표준 발음이 현실 쓰임을 고려하여 바뀌기도 합니다. ‘우영우’가 좋아하던 ‘김밥’은 [김ː밥]일까요, [김ː빱]일까요? ‘김밥’의 표준 발음은 [김ː밥]이었지만 2016년에 현실 쓰임을 고려하여 [김ː빱]도 표준 발음으로 인정되었고, 현재는 두 개 모두 표준 발음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일상 쓰임이 어문 규범을 바꾸기도
세월이 지나 단어의 용법이 바뀌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 예는 ‘너무’입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너무 착하고 예쁜 딸’은 시험에서 틀린 지문이었습니다. ‘너무’는 ‘넘다’로부터 온 단어로 ‘일정한 정도나 한계를 훨씬 넘어선 상태로’라는 뜻으로 부정적 맥락에서 자주 쓰이기 때문에, ‘착하다, 예쁘다’와 같은 말과는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국립국어원에서는 2015년 6월부터 ‘너무’가 긍정적 용법에서도 사용될 수 있다고 허용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너무 예쁘다, 너무 착하다’와 같은 문장을 많이 사용하게 되었고, 그것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너무’에 관한 용법을 바꾸게 된 것입니다.
이와 정반대의 변화도 있습니다. 긍정, 부정의 의미로 모두 쓰였던 ‘별로’가 현재는 부정적 용법으로만 쓰이는 것인데요. “주변 반응이 별로 신통치 않다.”와 같이, ‘별로’는 부정을 뜻하는 말과 함께 쓰이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옛 문헌에서는 아래와 같은 문장도 쓰였다고 합니다.

“별로 맛이 있다.”

‘별로’는 ‘특별’에 쓰인 한자 ‘별(別)’에 우리말 ‘로’가 붙은 단어로, 위 문장은 “특별히 맛이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렇지만 ‘별로’가 부정적인 의미로 더 많이 쓰이게 되면서 그 용법이 변화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말이 이전에 쓰던 말의 규범을 바꿀 수 있습니다.

시간에 따라 바뀌는 판결서 그리고 재판환경
판결서의 형식, 표현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뀝니다. 최근 대법원 판결에서는 ‘상고이유 제1점’이라는 표현보다는 ‘제1 상고이유’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연혁적으로 살펴보면, 1908년부터 1944년까지의 《高等法院判決錄》에도 ‘상고이유 제1점’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렇지만 의존명사 ‘점’(點)은 ‘백 점’과 같이 성적을 나타내거나 ‘그림 한 점’과 같이 그림, 생선, 바람, 빗방울 등을 세는 단어여서, ‘제1 상고이유’가 더 자연스러운 한국어 표현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상고이유’는 단위를 나타내는 일반 명사로서 띄어 쓰는 것이 원칙이겠지만, 순서를 나타내기도 하고 숫자와 어울리어 쓰이기도 했으므로 ‘제1상고이유’로 붙여 쓸 수도 있겠습니다. 한글맞춤법 제43항에 따르면, 단위를 나타내는 명사는 띄어 쓰지만, 순서를 나타내는 경우나 숫자와 어울리어 쓰이는 경우에는 ‘제1실습실’, ‘삼학년’과 같이 붙여 쓸 수 있습니다.

판결서뿐만 아니라 재판환경도 매일 변화하고 있습니다. 벌써 11월이면 영상재판 시행 1주년을 맞습니다. 원활한 재판 진행을 위해 ‘당사자와 눈 마주치기’, ‘마이크 쓰는 법’에 대해 배웠지만, 이제는 ‘화면 속의 당사자’가 바라볼 ‘화면 속의 재판장’의 모습과 컴퓨터를 통해 들리는 목소리도 중요해졌습니다. 미국과 같이 법정에서의 재판도 중계되면, 이제는 복식호흡으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카메라 앞에서 쫄지 않는 법’도 함께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언어는 언제나 변화하고 있습니다. 국어 정책의 목표는 쉬운 우리말, 편한 우리말, 나아가 품위 있는 우리말을 가꾸는 데에 있기 때문에, 어문 규범을 개정함으로써 언어의 변화를 수용합니다. 결국 어문 규범의 유효기간은 언어 변화에 따라 규범이 개정됨으로써 비로소 정해지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어문 규범뿐만 아니라 법률이나 제도, 우리의 일상 역시 외부 변화에 따라 유효기간이 정해지지만, 그 안에 있는 우리는 그 끝을 정확히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1년의 유효기간이 ‘365일’로 미리 정해져 있다는 점이 더욱 감사하기도 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2022년, 더욱 행복한 기억으로 채워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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