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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판사가 사는 법
1. 나는 대한민국 판사다
거리에 함박눈이 쏟아집니다.
겨울엔 으레 눈이 내리기 마련이지만,
눈 내리는 출근길은 쉽지 않습니다.
오늘도 제일 먼저 출근했습니다.
제가 일하는 공간이래 봐야
책상 하나가 전붑니다.
“식사는 하고 오셨어요?”
“식사는 따로 챙겨 먹지는 않고요. 사무실에서 미숫가루 같은 거”
저는 인천지방법원에서 근무하는
주은영 판삽니다.
이곳에서 일한 지 이제 3년째인
새내기 판삽니다.
형사 피고인들의
2심 재판을 맡고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함께 일하는 동룝니다.
외투도 벗지 않고
서류를 보는 이 사람은
올해 9년차인 윤찬영 판삽니다.
이런 모습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윤 판사님의 모습은
저에겐 낯설지가 않습니다.
“판사님 배즙 드실래요?”
“배즙이요?”
“배즙을 언제 드셨어요?”
“정혜영 주임님이 오늘 아침 엘리베이터에서”
“이걸 왜 저를 주세요? 정 주임이 주셨는데”
아침 인사치곤 좀 어색하죠?
중년 남성이 버스를 향해 뛰어 갑니다.
버스 안엔 다행히
앉을 자리는 있어 보이네요.
“매일 버스 타고 다녀요. 3년째죠.
갈 때는 1시간 10분에서 20분 정도 걸려요 안 막히면”
출근 길 버스 안에서 한 숨 자는 건
직장인들의 흔한 모습이죠.
거리엔 여전히 눈이 내리고..
버스도 평소보다 늦게 도착했습니다.
서울 서초동에서 인천지방법원까지
매일 버스로 출퇴근하는 이 사람은
17년차 현용선 부장판삽니다.
저희 재판부를 이끄시는 부장님이세요.
부장님, 오늘 좀 늦으셨네요.^^
이렇게 우리 3명이 한부를 이뤄
피고인의 유무죄와 형량을 결정하는
형사 재판을 맡고 있습니다.
2. 기록에 파묻힌 일상
판사 사무실 오전 모습입니다.
서로 한 마디도 건네지 않고,
자기 책상에 앉아서
재판기록만 열심히 보고 있네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캐비닛 안에 쌓여 있는
사건 기록들을 보면
여유를 부릴 틈이 없습니다.
수많은 조서와 증거를 꼼꼼히 봐야 합니다.
어떤 사건은 기록이 몇 권씩 되기도 합니다.
그냥 읽는 게 아니라
다름 사람 진술이랑 맞는지,
증거랑은 맞는지 살피면서
꼼꼼히 읽어야 합니다.
서류에 파묻혀 사는 인생이다 보니
이런 절간같이 고요한 분위기는 당연하겠죠?
“(판사들이) 그거 읽어봤다는 걸 당사자들이 걱정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아, 내가 냈는데 읽어 보셨나?”
엄청난 기록을 넘길 때 사용하는
비장의 무기가 있습니다.
판사들의 필수품 고무 골무입니다.
“골무는 한 서넉 달 쓰면 바꿔요. 이게 지금 많이 닳았졌잖아요.”
“개인적으로 사세요?”
“아니요 보급품입니다. 하하 법원에서 지급해줍니다.”
부장님과는 상의할 일이 많습니다.
저 같은 배석 판사들은
배당된 사건들 판결문을 작성해서
부장판사에게 제출하고
그걸 놓고 서로 의견을 나눕니다.
“방금 그게 어떤 상황인거죠?”
“결론을 조금 수정하려고 부장님한테 말씀 드린 거”
“의견이 안 맞을 때도 있나요?”
“계속 이제 설득을 하는 거죠. 서로”
상의 끝에 판결문을 다시 썼습니다.
학창 시절 담임선생님께
숙제 검사 받는 것처럼 긴장됩니다.
이번엔 윤 판사님 차롑니다.
아무래도 어렵다는 그 사건을 맡아서
골치를 썩이는 듯합니다.
부장님과 여러 차례 상의한 뒤에도
분주하게 기록을 살펴봅니다.
이미 밤은 깊어갑니다.
“판사님 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네 들어가세요.”
혼자 사무실에 남은 윤 판사가.
출출한 모양입니다.
이럴 땐 컵라면이 최곱니다.
“라면을 먹은걸 아시면 (부모님들이) 안 좋아하시겠죠.”
근데 컵라면을 사무실 밖에서 서서 드시네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윤 판사의 평소 성격 그대롭니다.
“야근하게 될 때 라면을 방에서 먹으면 신경이 쓰일 수가 있으니까
부속실에 나와서 먹거든요.”
그래도 사건을 둘러싼 고민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나 봅니다.
“아~사건 너무 어렵네....”
3. 판사들만의 소소한 일상
복장이 이상하다구요?
가끔 이렇게 입고
부장님과 함께 가는 곳이 있습니다.
“지금 어디가시는 거예요?”
“네 점심시간에 요가 합니다. 동호회에서요. 요가 하러 가는 길입니다.”
하루 종일 앉아서 기록을 보는 판사들에게
건강관리는 필숩니다.
이곳저곳 아프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돕니다.
부장님 권유로 저도 열심히 따라하고 있는데요,
제법 능숙해보이나요?.
윤찬영 판사는 다른 운동을 합니다.
“무거운 사건도 많으니까 심적, 육체적으로 부담이 많이 될 수 있거든요.
부장님 되셔도 배석들한테 운동하는 거 권하시는 편이죠.
운동해라, 챙겨 먹는 거 잘 챙겨 먹어라. 그래야 버틴다.”
4. 새내기 판사의 고민
재판에 들어가야 할 시간입니다.
법복은 판사의 상징입니다.
윤 판사님은 법복을 입을 때도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네요.
이럴 때 부장님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오늘도 재판을 잘 아무 탈 없이 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가죠.”
판사들이 드나드는 법정 출입문은
따로 있습니다.
“복장 규정이 따로 있습니까?”
“너무 화려한 색의 옷은 입지 말고 가죽 소재 옷도 입지 말고”
“가죽 소재의 옷도?”
“잘 이해가 안 되는데 하여튼 가죽 재킷 입지 말라고 부츠도 신지 말라고 하시고.”
판사 임용 첫해 민사 재판을 맡았던 저는
힘든 한해를 보냈지만,
지금은 형사 재판을 하며
나름대로 보람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첫해 느끼지 못했던
현실적인 고민들도
하나둘씩 알게 되더군요.
“남자 판사님이었다면 뭐 권위가 있다거나 이렇게 표현할 행동들도 여자 판사가 하면
뭐 신경질적이라든가 뭐 히스테리 부린다든가 그런 식으로 보는
부분들이 있으니까”
모든 판사는 전국을 돌며
근무지를 바꿔야 하고,
경력이 늘어날수록 오히려
업무량이 폭증한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무엇보다도
판사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이
끊임없이 어깨를 짓눌렀습니다.
“머리를 쥐어짜서 결론을 내려도 이게 맞는 것인가? 판사가 뭔데?
너희가 이렇게 결정을 하느냐? 내가 뭔데 내가 어떤 자격이 있어서
이런 일을 하는가?”
“먼저 들어갈게요. 내일 뵐게요.”
오늘은 오랜만에
반가운 모임에 나갑니다.
“판결문 몇 개 썼어요? 지금까지”
“보통 4개?”
“우린 6개”
인천지방법원 젊은 판사들이 뭉쳤습니다.
평소 조용히 살던 판사들도
밖에만 나오면 왜 이리 수다스러운지..
“판사님들이 말이 별로 없잖아요. 저 사람들 왜 저러나 했는데 내가 판사 되니까
나도 그렇게 되어 있더라고.
그냥 말이 없어져요. 오랜만에 만나니까 입이 트여서 말 많이 하게 되고.”
처음 판사가 됐을 때 그 순간은
모두에게 잊지 못할 기억입니다.
“플래카드 붙였겠네요?”“붙었죠. 저는 붙었는데”
“나도 붙었어요. 나는 여기저기 다 붙었어요. 진짜 너무 부끄럽게”
“할머니가 진짜 못 걸으시다가 그날 정말 맑고 밝은 얼굴로 동네 사람들하고
막 너무 행복한 표정으로 그래서 진짜 보람이 있었어요. 효도한 거 같고”
젊은 판사들은
어떤 고민을 갖고 있을까요?
“작년 1년 동안은 너무 답답해서 혼자 벽보고 소리 지르고 싶을 때도 있었어요.
내가 판사라고 했을 때 사람들이 나를 판사로 생각할까 그런 걱정도 있었고”
“나무만 보다가 숲을 놓치는 경우도 있고 숲만 보다가 나무를 놓치는 경우도 있고
내가 자질이 되나 이런 생각은 좀 고민이 많이 되는 거 같아요.”
젊은 판사들은 저마다
원숙한 법관이 되기 위한
성장통을 앓고 있었습니다.
5.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세 분의 동상 중에 가운데 앉아 있는 분이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입니다.
사법연수원 시절,
이 분의 전기를 읽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어느 조직이든 그 조직이 잘되려면 사표가 있어야 합니다.
사법부는 우리나라에 다행히 김병로 선생이 계세요.”
1887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난 김병로 선생은
24살의 나이로 도쿄 유학을 떠나
법학을 공부했습니다.
일제 시대에 법학 공부를 한 조선 사람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였답니다.
귀국 후 변호사 자격을 얻기 위해
잠시 판사로 재직하기도 했지만,
1년 만에 변호사로 변신해
100여건의 독립운동 사건을 변호했습니다.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김상옥 사건
제2차 의열단 사건
6.10 만세 사건
광주학생독립운동
안창호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
이 때문에 변호사 자격 정지까지 당했던
김병로 선생은 나라 없이 방황하는 자신을
스스로 거리의 사람, 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일제 강점기 말년을 힘겹게 지낸 선생은
광복 후 미 군정 시절 사법부장으로
우리나라 사법부의 기틀을 세우고,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에
임명됐습니다.
“형법 학자였죠, 그 다음에 판사, 변호사 실무가였죠, 그러니까 사법부에서는
이 분 이상 가는 분이 없는 거죠”
6. 대통령과 맞선 대법원장
6.25 전쟁중이던 1952년 4월,
전남 순천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을 반대하던 한 국회의원이
자신을 살해하려던 현역 군인을 사살한 겁니다.
평소 그 의원을 괘심하게 생각했던
이 대통령은 그를 구속하고
엄벌에 처하라고 압박했지만,
법원에서 정당방위로 무죄를 선고하자
격노했습니다.
“그런 재판이 어디 있느냐?
현역 장교를 권총으로 쏘아 죽였는데 무죄라니?“
서슬 퍼런 대통령의 불호령에도
김병로 대법원장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판사의 판결도 대법원장도
이래라 저래라 못합니다.“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항소하십시오.“
여전히 일제 잔재가 남아 있던 시절
친일파 처벌을 위해 반민특위가 구성됐습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파 엄벌을 반대했습니다.
“관대한 편이 가혹한 형벌보다
동족을 애호하는 도리가 될 것이다.“
일제 시대 고문기술자였던 한 형사가 체포되자
대통령의 압박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대통령을 등에 업은 경찰이
오히려 반민특위 위원을 연행하자
대법원장은 기자회견을 자청해
대통령을 향해 날을 세웠습니다.
“추호라도 용서 없이 판단을 내릴 것입니다.”
매사 헌법과 원칙을 고수한 대법원장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대통령은
그를 이렇게 비꼬았습니다.
“요즘 헌법 잘 계시는가?”
그런 대통령에게 대법원장은
정중히 답했습니다.
“사법부는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절대 권력자에게도 굴하지 않고
대법원장 김병로가 지키려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요?
“폭군적인 집권자를 억제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법부의 독립뿐이다.“
“사법부의 독립, 그다음에 법관의 독립, 그걸 굉장히 강조했어요.
여러 가지 제도나 그런 부분에 있어서도 완벽하게 사법부가
입법부나 행정부를 견제할 수 있는 그런 사법부를 만들기 위해 평생을 몸을 바쳤다.”
7. 생활인으로서의 고민
“판결을 선고하겠습니다. 원심판결을 파기합니다.”
“선고할 때 좀 버벅거렸어요. 긴장했나봐요. 허허
재판하고 나면 그날은 좀 홀가분하고요.”
늘 자상한 성품의 현용선 부장님도
고민이 없는 건 아닙니다.
“집사람도 슬슬 얘기하기 시작했죠. 애들에 대한 지출도 늘어나고
주거비용도 늘어나고 그러니까 사실 부족하죠. 아무래도 여유가 없죠.”
경제적으로 어려워졌다고 해서
법원을 나가 변호사로
큰 돈을 버는 시대도 지났습니다.
초임판사 1호봉은 세전 월급 259만1000원
10년차 판사의 경우 6호봉
월급 392만9700원 수당 50만원 안팎
“집으로 가세요?”
“오늘은 동창들 모임, 송년회가 있어요.
대학동창들 모임이 있어서”
“얼마나 오랜만에 보시는 거예요?”
“1년 만에 보는 거 같아요.”
“늦어서 미안해”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나는 유쾌한 시간인데도,
대한민국 판사에게는 가끔은
이렇게 사람 만나는 게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무턱대고 판사를 찾아오는 사람은 없으니까 근데 전혀 관계없이 느닷없이
알음알음으로써 찾아온다든지 전화가 온다든지 그러면 그런 경우는
100%입니다 뭔가 일이 있어요.”
“법정관리기업에 자신의 친구를 변호사로 선임하도록 알선한 부장판사에게
벌금 300만원이 선고됐습니다.”
“한 부장판사가 재판 도중 부인에게 마약을 먹여 결혼했냐는 막말을 했습니다.
늙으면 죽어야 된다고 말한 판사도 있었죠?”
판사들은
늘 최선의 판결을 위해 애쓰고 있지만,
법원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이
싸늘해지고 있는 것이
당황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비판의 성역이었던 판결 내용도
어느덧 도마 위로 오르고 있습니다.
“법관으로서의 고민에 바로 그 부분이 가장 큰 부분이죠.
법원의 어떤 신뢰, 판사에 대한 신뢰,
돈 받고 어떤 판결에 무슨 영향을 주는 것 아니냐
뭐 이런 식의 생각하시는 분들이 아직도 있고요.”
정말 판사답게 산다는 건 어떤걸까요?
8. 가인에게 길을 묻다
6.25 전쟁 직후 한 판사가
김병로 대법원장을 찾았습니다.
“박봉이라 먹고 살기 힘듭니다..그만 두겠습니다.”
하지만 대법원장의 한마디에
그 판사는 사표를 거둬들였습니다.
“이보게 나도 죽을 먹으며 사네.”
한복 두루마기에 운동화,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누구보다도 청빈한 삶을
법관의 자랑으로 알던
대법원장의 호소였기에
그 울림이 컸을 겁니다.
3cm짜리 몽당연필.
반으로 잘라 피운 담배.
점심은 도시락으로 해결했습니다.
“사법관으로서 청렴한 본분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되면,
사법부를 용감히 떠나야 합니다.“
괴팍하리만큼 지독하게 청렴을 강조했던
김병로 대법원장이 말하려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법관이 국민으로부터 의심을 받게 된다면
법관으로서는 최대의 명예손상이 될 것입니다.“
“한 사람의 명예실추는
법관 전체의 명예손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가 돌아가신지 벌써 50년.
지나온 세월만큼 시대와 상황이 바뀌었지만,
단순한 직업인이 아닌 법관으로서의
숭고한 소명 의식을 단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된다는 그의 가르침은
항상 마음속 깊이 간직할 것을 다짐합니다.
“우리 법관만큼은 최후까지
정의를 사수해야 할 것입니다.“
“故 김병로(1887-1964)”
9.. the END
재생시간 : 25분 39초
2014년 1월 7일(화) 저녁 8:55경 SBS “현장 21”에서 가인 김병로 선생님의 뜻을 현대적으로 조명하는 "대한민국 판사가 사는 법"이 방송되었습니다.
인천지방법원의 한 재판부의 일상을 밀착 취재하여 보여주고,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법관들의 삶과 고민을 위 재판부의 법관 한 명이 직접 들려 줄 것입니다. 그리고 가인 김병로 선생님의 삶과 대법원장으로서의 업적을 되돌아보고, 가인 선생님께 지금 법관들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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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8 -
2015-12-16 -
2015-12-07 -
2015-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