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사람] 씨름은 나의 희열 나의 자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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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사람] 씨름은 나의 희열 나의 자부심 - 허선행 선수

2021.04.07

허선행선수

씨름은 나의 희열 나의 자부심

영암군 민속씨름단 허.선.행. 선수

씨름이 국민스포츠로 큰 인기를 누리던 시절이 있었다. 천하장사 결승전이 열리는 날은 길거리가 텅텅 비었고, 밤 9시 뉴스가 천하장사 결승전 중계방송에 뒤로 밀려나기도 했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조금씩 시들해지던 인기는 1997년 외환위기로 씨름단 다수가 해체하면서 그마저도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그랬던 씨름판이 다시 들썩이기 시작한 데는 KBS 씨름 예능 <씨름의 희열> 덕이 컸다. 실력에 비주얼까지 두루 갖춘 경량급 씨름선수들 중에서도 돋보였던 허선행 선수는 씨름의 부흥을 이끌며 어느새 씨름판의 자부심이 되었다.

글. 민경미 사진. 이정도

정말 좋아하는 덴 이유가 없다
봄의 힘줄은 남쪽으로 갈수록 도드라졌다. 서울에서 주춤대며 오던 봄은 서남단 끝자락의 전남 영암에서는 기선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봄이 새로 돋은 잎과 꽃으로 여기저기서 힘 자랑하는 사이 인간계에서 힘깨나 쓰는 이들도 영암에서 뭉쳤다. 전국 최강의 씨름단으로 등극한 ‘영암군민속씨름단’이 그들이다. 무화과와 월출산 등으로 유명한 영암의 새로운 자랑거리가 된 씨름단은 올 초 허선행 선수를 영입하면서 비어있던 퍼즐을 채우고 완전체로 거듭났다. 가장 가벼운 태백체급의 기량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씨름단의 빈틈을 2000년 이후 최연소 태백장사의 타이틀을 보유한 허선행 선수가 메운 것이다.
1999년생인 허선행 선수의 나이는 올해 스물셋. 소속 씨름단에서 막내지만 씨름 경력만 놓고 보면 결코 내공이 얕지 않다. 초등학교 2학년, 아홉 살에 씨름에 입문했으니 자그마치 14년을 씨름선수로 살았다. 그것도 매우 자발적이고 자기 주도적으로.
“그냥 씨름이 좋았어요.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거나 롤모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느 순간 씨름에 빠져들어 씨름을 잘하고 싶다는 생각만 하며 살았어요. 그게 전부예요.”
정말 좋아하면 이유란 게 없다고 했다. 실제로 그가 들려주는 씨름 입문기의 서사는 싱거울 만큼 짧지만, 씨름에 대한 진심의 순도는 오차범위도 없는 100%임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니까, 아홉 살이었던 허선행 선수는 하굣길에 우연히 교내 씨름부 형들의 연습 장면을 목격하고는 불현듯 씨름을 하고 싶다는 갈망에 휩싸인다. 바로 그날 감독의 허락을 받고 (씨름기술 하나 익히지 않은 상태에서) 형들과 시합을 하게 된다. 결과는 1승 1패. 6학년 형들에게는 졌지만, 5학년 형들은 모조리 제압한 그에게 감독은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건넨다. “내일 아침 운동부터 나와라.” 허선행 선수는 그렇게 씨름부의 일원이 되었고, 이후 온종일 씨름만 생각하는 순정한 씨름선수가 되었다.

허선행선수

씨름의 희열을 씨름판의 희열로
허선행 선수가 대중에게 알려진 건 2019년 11월 말부터 이듬해 2월까지 방영한 KBS 씨름 예능 <씨름의 희열>에 출연하면서부터였다. 방송을 통해 이름과 실력을 알리고 팬덤과 인기를 얻었지만, 씨름판에서 허선행 선수는 일찍이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씨름선수로 맨 처음 조명을 받은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인 2016년. 그해 6월 제주에서 열린 ‘제30회 전국 시도대항 장사씨름대회’에서 그는 개인전 1위를 거머쥐었다. 단체전 1등 경험은 있어도 개인전 1위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듬해에는 무려 5관왕을 달성하며 단박에 고등부 최강자 자리를 꿰찼다. 그 기세로 씨름 명문 한림대학교에 입학했지만, 한 학기 만에 그만두고 실업팀에 들어간 그는 실업 무대 데뷔전인 ‘2019 설날 장사씨름대회’ 3위에 이어 같은 해 11월에 열린 ‘2019 천하장사 씨름대축제’에서 처음으로 태백장사의 타이틀을 차지했다. <씨름의 희열>은 그가 씨름선수로서 첫 번째 정점을 찍은 직후에 출연한 셈이다. “경기마다 노력도 많이 했지만 운도 좋았어요. 방송 출연도 운이 좋아서 기회가 왔다고 생각해요. 비록 허리부상으로 기권하며 성적 면에서는 아쉬움을 남겼지만, 처음으로 저를 응원해주는 팬이 생겼다는 점에서 감사한 마음이 크죠.”
인기를 방증하듯 ‘씨름돌’을 시작으로 이후 허선행 선수에게는 ‘뽀시래기’, ‘5초 컷 승부사’, ‘모래판 박효신’, ‘힘줄미남’, ‘샤먼프린스’ 등 수많은 별명이 붙었다. 이 중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간다는 ‘샤먼프린스’는 그가 경기를 앞두고 실행에 옮기는 일곱 가지 징크스에서 비롯된 별명으로, 그의 두 번째 방송 출연 프로그램인 KBS 관찰 예능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에 해당 장면이 나오면서 생긴 것. 요즘 그는 두 번째 소속 실업팀이자 올 초 이적한 영암군민속씨름단 김기태 감독과 함께 관찰 예능을 통해 씨름선수로서의 일상은 물론 승부욕과 패기 이면에 숨어있던 여러 반전 매력을 선보이며 또 한 번 인기몰이 중이다.
“씨름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지난해 혹독한 슬럼프를 겪었어요. 부상과 재활의 반복으로 씨름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스트레스와 함께 힘든 시기를 보냈죠. 그때 손을 내밀어준 곳이 지금의 소속팀인 영암군민속씨름단이예요. 체계적인 훈련을 할 수 있고, 평소 닮고 싶었던 형들이 소속된 팀이어서 언젠가는 함께하고 싶었는데, 그 바람이 일찍 이루어진 거죠.”
소속팀 이적과 예능 프로그램 출연으로 분위기를 전환한 허선행 선수는 최근 씨름판에서도 부진을 털어내고 또 한 번의 전성기를 예고하는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영암군민속씨름단 소속으로 출전한 첫 대회이자 긴 재활 끝에 도전장을 낸 ‘2021 위더스제약 설날 장사씨름대회’에서 2019년에 이어 통산 두 번째 태백장사에 오른 것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를 응원하는 수많은 팬으로 인해 씨름판의 분위기와 온도가 이전과는 사뭇 달라졌다는 것. 소수만이 공유했던 씨름의 희열은 어느새 씨름판의 희열이 되었다.

허선행선수

씨름할 수 있다는 행복
씨름은 모래판이나 매트 위에서 샅바를 허리춤에 둘러맨 두 선수가 상대편의 샅바를 잡고 기술로 상대를 넘어뜨리는 비교적 단순한 경기다. 승패 또한 쉽게 갈리는데, 발바닥을 제외한 상대의 신체 어느 부분이라도 먼저 땅에 닿으면 끝이 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한순간의 실수나 체중 쏠림 등이 실점으로 직결되는 단순함 때문에 오히려 짧은 시간 안에 복잡미묘한 심리전과 기술이 오가는 스포츠라고 말한다. 허선행 선수가 씨름의 관전 포인트로 한눈팔지 않는 집중력을 꼽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씨름의 매력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거예요. 그래서 씨름 경기를 관전할 때는 적어도 1분 동안 집중해달라고 당부하고 싶어요. 특히 제 경기는 빠르면 몇 초 안에도 승부가 갈릴 수 있으니 초집중해서 지켜봐 주세요.”
그의 별명 중 하나인 ‘5초 컷 승부사’에서 짐작할 수 있듯 허선행 선수의 경기는 휘슬이 울린 후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 끝나는 게 보통이다. 그의 주특기인 밭다리걸기(오른쪽 다리로 상대의 오른쪽 다리를 밖으로 걸어 앞으로 당겨 붙이면서 상대의 뒷면으로 중심이 기울어지도록 감아 밀어붙여 넘어뜨리는 기술)가 제대로 먹히면 승패의 순간은 더 빨라진다.
요즘 허선행 선수는 방송 촬영을 제외하고는 영암군 소재의 씨름연습장에서 온종일 훈련만 반복하고 있다. 지난해 부상으로 인한 슬럼프를 겪으면서 자신의 삶에서 씨름이 얼마나 소중하게 자리 잡고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는 그는 앞으로도 다치지 않고 씨름하는 게 가장 큰 목표다. 다치지 않아야 좋아하는 씨름을 마음껏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매일 씨름을 더 잘하고 싶다는 생각만 줄기차게 하는 만큼 장사 타이틀을 늘려가고픈 바람도 크다. 당장 4월 중순에 예정된 ‘해남 장사씨름대회’를 준비 중이라는 그는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다시 씨름연습장으로 향했다. 소년과 청년, 그 사이 어디쯤 머물던 선수의 눈빛에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좋아할 수 있는 사람만의 순도 높은 행복이 반짝거렸다.

허선행 선수 영암군민속씨름단 소속 선수로, 2019년과 2021년에 걸쳐 2번 태백장사 타이틀을 보유한 2000년대 이후 최연소 태백장사다. 지금까지 15관왕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실력파로, 최근 소속팀 김기태 감독과 함께 KBS 관찰 예능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에 출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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