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글] 당신의 휘게소는 어디인가요

테마가 있는 글

2018.02.06

휘게(hygge) 소(所)

우리 동네에 낯선 간판이 보입니다. ‘휘게소’.

휴게소도 아니고, 휘게소는 뭘까? 가까이 가보니 입구 앞에 작고 파란 표지판이 놓여 있습니다. ‘hygge所’라고 쓰여 있네요.

유리로 된 가게 안을 살짝 들여다봤더니 김밥을 파는 작은 식당 같은데... 아,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 식당 이름이 참 마음에 듭니다. 피식 나오는 웃음을 굳이 참지 않은 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갑니다.

“여기, 김밥 한 줄 주세요.”

제가 처음 ‘Hygge’*를 알게 된 것은 꽤 오래전 스웨덴 친구가 사진 한 장과 함께 건넨 한마디 “Let’s have fika.” 덕분입니다. ‘FIKA’라고 적힌 사진 속 컵을 보고 ‘Fika’가 카페 이름이라고 생각한 저는 “그 카페가 어디에 있는데?”라고 물었죠.

친구는 “‘Fika’는 카페가 아니라, 커피를 마시며 서로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이야기와 그 순간의 행복을 나누는 시간이자 하나의 문화야.”라고 답했는데, 너무 생소하고 와 닿지 않아 여기저기 검색하던 중 ‘Fika’와 마찬가지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다스리며 삶의 만족도를 높이는 태도’와 관련된 키워드 ‘Hygge’를 만났습니다.

성공과 경쟁만을 좇아 살던 오늘날의 사람들이 문득 뒤편에서 오고 있는 북유럽 사람들의 늦은 발걸음, 한번 쉬어가는 쉼터, 잠시 자연을 바라보는 긴 호흡 등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나만의 편안함, 삶의 쉼표, 사람들과 나누는 진정한 소통과 정감을 모두 ‘Hygge’를 통해 얻으며, 그 속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 Hygge(휘게: 덴마크어·노르웨이어)는 편안하고 기분 좋은 상태 또는 따뜻하고 아늑하고 안락한 분위기를 뜻하는 명사이다. 나아가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혹은 혼자서 보내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이나 안락한 환경에서 오는 행복을 찾는 생활방식을 의미한다. 소박한 삶의 여유를 즐기는 이러한 북유럽식 생활방식은 곧 북유럽만의 문화적 정체성이 되었다. 서구 언론이 높은 행복 지수를 자랑하는 덴마크 국민들의 비결로 ‘Hygge’를 소개하면서 그 열풍이 전 세계로 번졌다. 특히, 같은 유럽임에도 북유럽식 행복과 여유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영국은 BBC 등에서 북유럽식 행복의 단어 ‘Hygge’, ‘Fika’, ‘Lagom’ 등을 자주 소개하고 있다. 콜린스 영어 사전은 2016년 영국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인 ‘Brexit’(브렉시트) 다음으로 ‘Hygge’를 꼽기도 했다.

나의 ‘Hygge’, 나의 ‘행복’

저의 행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던 행복을 알아챈 때는 한 달가량의 유럽 여행을 다녀온 뒤였습니다. 실은 답답함뿐인 일상으로부터 도망치듯 떠난 여행이었습니다. 유럽에서의 기분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제가 서 있던 곳,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 덕분에 모든 순간이 즐겁기만 했습니다.

저스틴 비버의 신곡을 부르며 신나게 제 앞을 걷는 스페인 여학생들의 뒷모습이 너무나 예뻤고, 미장원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아저씨들이 보이는 큰 창문이 좋았습니다. 동네 뒷동산에 올라 노을을 구경하는 젊은이들 틈에 앉아 있으니 숨통이 트이고 마음이 그토록 편할 수 없었습니다.

단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일상에 돌아가서도 늘 간직하고 꺼내 보며 잊지 않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본 모든 것을, 그러니까 저를 행복하게 한 그 모든 것을 집착하리만큼 카메라에 하나하나 담았습니다. 10m를 걷는 것만 해도 한참일 정도였습니다.

여행을 다녀온 뒤, 수천 장의 사진을 펼쳤습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 많은 사진 중에 멋진 건물, 유명한 박물관, 유적지 같은 랜드마크는 한 장도 없었습니다. 전부 흔해 빠진 담장, 보도블록, 횡단보도, 신호등, 하늘, 구멍가게, 가격표, 표지판, 초인종, 혹은 상인이나 행인들의 모습뿐입니다.

이상하죠? 이 모든 것은 유럽을 떠나기 전에도 늘 제 일상에 있던 ‘별 것도 아닌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아무 의미 없다’라고 여겼던 것들을 유럽에서는 스치기가 그토록 아쉬워 카메라에 담느라 참 애를 썼습니다. 왜 여태 몰랐을까요. 놓치기 아깝던 그것들은 우리 동네에 늘 있던 신호등이고 사람들이고 하늘입니다. 왜 여태 보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그제야 우리 아파트 현관 옆의 모과나무가 눈에 띄었고, 매일 걷는 횡단보도에서 바라본 분홍색 석양이 유럽에서의 그것보다도 아름다웠습니다.

영동지원으로 첫 발령을 받아 서울에서 내려온 지 9개월이 지난 지금은 이곳만의 행복을 만끽합니다. 스카이라인이 낮은 덕에 유독 넓은 하늘은 아침에는 구름을, 밤에는 별을 가득 담아 보여줍니다. 손을 꼭 잡고 등교하던 어린 남매 덕에 발견한 하천의 돌다리는 건너편에서 누군가 건너오기 전까지 송사리, 다슬기, 오리, 백로를 관찰할 수 있는 출근길의 명당입니다. 법원 뒤 자두밭에 하얗게 만개했던 꽃이 지고 붉은 자두가 익는 모습, 어딜 가나 주황 감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수백 그루의 가로수 감나무, 그 사이사이에 숨어 있는 호두나무와 대추나무를 구경하는 재미가 어쩜 이리 쏠쏠한지요.

나만의 휘게소 찾기

그런데 친구들은 저에게 무척이나 자주 ‘힘들어, 힐링할 시간이 필요해, 잠시라도 다 잊고 휴양지로 떠나고 싶어, 그만두고 싶어’라고 합니다. 물론 먼 곳으로 떠나 잠시 일상을 잊은 채 홀가분한 마음으로 맛있는 음식도 먹고 평소에 쉽게 할 수 없던 활동을 하면 큰 활력소, 에너지, 해방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큰 단점이 있지요. 시간과 비용, 업무 여건 등의 이유로 큰맘을 먹지 않고서야 대부분은 그저 희망사항으로 그친다는 겁니다. 포기할 때마다 느끼는 박탈감으로 심신은 더욱 지칩니다. 일상은 자꾸만 ‘버티는 것’이 되고, ‘버티는 것’은 금세 ‘힘들고 피하고픈 것’이 됩니다. 때문에 더욱 큰 현실성을 원하는 지친 현대인들이 ‘YOLO Life’보다 ‘Hygge Life’에 점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일까요. 삶의 행복을 위해서 생각의 관점을 바꾸려는 노력으로 ‘책을 몇 권 읽어야겠어’, ‘강의를 들어 봐야지’라는 다짐도 하지만, 근본부터 바꾸려니 뭔가 쉽지 않은 것 같고 오랜 시간이 걸릴 것만 같아 시작조차 미루게 됩니다.

이제, 조금 더 쉽고 가까운 곳에서 방법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분명히 지금 이 순간에도 깊은숨을 들이쉴 짬은 있을 것입니다. 그 시간이 비록 짧을지라도 그 순간 느끼는 편안함과 안락함 역시 행복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게다가 아마도 그 행복은 절대 작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 짧은 순간이 저의 하루를 무척이나 소중하게 바꿔 주었으니까요.

김밥집 ‘hygge所’ 간판 아래 앉아 한입 가득 김밥을 물고, ‘Hygge를 실천하는 31가지 방법’이라는 칼럼을 읽으니 문득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떠오릅니다. ‘나만의 휘게소 찾기’를 제안합니다. 내가 있는 장소가 휘게소라면 그곳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는 전혀 고민할 필요도 없을 테죠. 무엇을 하든지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내 마음이 편안하고 안락하다면 그 순간이 ‘Hygge Life’ 아닌가요.

저의 휘게소를 소개합니다. 매일 출퇴근을 함께하는 초록색 자전거입니다. 관사에서 법원까지 자전거를 타는 8분 동안은 울리는 휴대폰도 받을 수 없으니 누구도 저를 방해하지 않습니다. 마음 가는 대로 무슨 생각이든 할 수 있고, 마음 가는 대로 아무 생각 안 할 수도 있습니다. 8분은 온전히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전부입니다. 며칠 전 휘게소 한 곳을 더 마련했습니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짐을 쌓아두던 1평 남짓한 공간이었는데, 작은 캠핑 의자 하나를 놓으니 어릴 적부터 꿈에 그리던 아지트가 되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낮에는 바람 냄새가 나고요, 밤에는 곤충 소리가 들리고 달과 별이 보입니다. 밤마다 울어대는 듣기 싫던 솔부엉이 소리도 휘게소에서 들으니 재밌기만 합니다. 온전히 그 순간을 느끼는 묘미를 알아버렸습니다.

당신의 휘게소를 찾아보세요

나만의 서재 또는 단골 식당이나 카페가 있다면 별 5개짜리 휘게소가 될 수 있겠지만, 그런 곳이 없더라도 좋습니다. 내 맘대로 상상하고 생각하는 순간을 제공하는 공간이라면 그 시간이 찰나일지라도 충분합니다. 오히려 특별한 곳이 아니라면 좋겠습니다. 출근하자마자 사무실 의자에 앉아 숨을 돌리는 5분이 편안함을 준다면 그 사무실 의자가, 혹은 동료 직원과 안부 인사를 나누며 커피믹스 한잔 마시는 5분이 가장 편안하다면 서 있는 창문 앞이, 그 순간만큼은 당신의 휘게소가 아닐까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화장실에 앉아 신문을 읽는 동안이 가장 안락하다면 바로 그곳입니다.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틀고 따라 부를 수 있는 차 안, 주말마다 이용하는 서울행 버스의 첫 번째 자리,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 혹은 피아노 의자, 욕조 안, 이불 속, 옥상, 벤치, 미용실 의자, 비 오는 날 우산 아래, 어디든 될 수 있습니다. 나만의 휘게소를 찾아보세요. 그곳이 휘게소라면, 휘게소에 머무는 단 몇 분이 당신의 삶을 마법처럼 바꿔 줄지도 모릅니다.

찬바람이 불면 사람들은 바삐 흘러간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나만의 시간과 여유를 그리워합니다. 그렇기에 새해의 문턱에 들어선 요즘은 북유럽식 행복을 생각해 보기에 꼭 알맞은 시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느 곳에서 어떻게 사느냐보다는 매 순간 나의 마음과 생각이 어떠한가에 따라 행복이 찾아온다는 것을 함께 전하고 싶습니다. 한 번뿐인 삶에 미련과 후회가 남지 않도록 즐기는 ‘YOLO Life’도 저는 참 좋습니다. 그런데, 과연 행복을 위한 특별한 시도 또는 변화만이 해답일까요. 행복은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써 내가 스스로 만들어가고 얻어야 하는 것임을 북유럽으로부터 배웠기에, 저는 어디에선가 펼쳐지고 있을 흥미로운 일보다는 지금 바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옆 사람과 짧은 담소가 더 기다려지고 설렙니다.

김밥 한 줄을 먹는 동안, 휘게소라는 식당 이름을 지은 주인아주머니의 마음이 느껴져 단골 식당에 들른 듯 괜스레 긴장이 풀리고 또 한번 웃음이 납니다. 문을 열고 나오니 궁금해집니다.

특별한 준비가 필요 없는,

당신의 휘게소는 어디인가요.

글 김새솔(청주지방법원 영동지원 속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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