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 나의 삶_겨울 한라산을 오르며

테마가 있는 글

2017.10.02

오늘은 토요일입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인근 초등학교 운동장을 뛰면서 밖의 날씨를 살핍니다. 햇빛이 비추지만 공기는 차갑고 바람이 세게 불며 길 여기저기에는 며칠 전부터 내린 눈이 녹지 않아 눈이 가득합니다. 저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도 눈으로 뒤덮여 흰색으로 반짝입니다. 전 설레는 마음으로 운동장을 10바퀴 정도 뛴 다음 집으로 돌아옵니다. 샤워, 청소, 빨래를 마친 후 얇은 옷을 3~4개 겹쳐 입고, 아이젠을 넣은 가방을 메고서 밖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사륜구동차를 타고 시내를 벗어나 오늘의 목적지로 숨 가쁘게 달려갑니다. 그렇습니다. 제목을 통해서 미리 아셨겠지만 전 오늘도 겨울 한라산을 오르려고 합니다.

한라산에 오르는 경로는 관음사, 성판악, 돈내코, 영실, 어리목이 있습니다. 한라산의 정상, 즉 백록담에 오르려는 경우 관음사, 성판악 경로를 이용해야 합니다. 관음사 경로가 성판악 경로보다 경사가 심해 대부분 등산객은 성판악에서 올라 백록담에 이른 후 관음사로 내려오는 경로를 이용합니다. 백록담 까지 등산하는 것이 어려운 경우 등산객들은 어리목에서 올라 윗세오름에 이른 후 영실로 내려가는 경로나 그 반대의 경로로 한라산을 둘러봅니다. 후자의 경우 좀 더 여유가 있는 등산객들은 윗세오름에 이른 후 남벽 분기점까지 갔다가 돈내코로 내려가는 경로, 또는 남벽까지 갔다가 다시 윗세오름으로 돌아와 어리목이나 영실로 내려가는 경로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전 오늘 친구와 점심식사 약속이 있어 시간이 조금 덜 걸리는 경로, 즉 어리목에서 올라 윗세오름에 이른 후 남벽 분기점에 들렀다가 다시 윗세오름으로 돌아와 영실로 내려가는 경로를 이용해 한라산을 둘러보려고 합니다. 제주시는 제주시청을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을 구제주, 제주도청을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을 신제주라 칭합니다. 어리목은 신제주 지역에서 도깨비 도로로 알려진 1100도로를 따라 서귀포시를 향해 남쪽으로 가는 도중에 있습니다. 시내에서 한라산으로 향하는 도로는 모두 오르막이다 보니 눈이 오면 도로를 통제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리목까지 가지 못할 때도 적지 않은데, 전 오늘 운이 좋게도 제 차로 등산로 입구에 있는 어리목 휴게소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도로가 통제되지 않았다고 해도 도로에 쌓인 눈이 녹지 않아 미끄럽습니다. 따라서 운전자는 자동차 바퀴에 체인을 채우는 등의 조치를 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어리목 삼거리에서 어리목 휴게소까지 가는 도로가 통제되기도 해 어리목 휴게소에서 상당히 떨어진 어리목 삼거리에서부터 등산을 시작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어리목 등산로 입구에서 사제비 동산까지는 등산로 주변으로 땅과 잎을 잃은 나무와 그 가지에 눈이 수북이 쌓인 눈 세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어리목에서 오르는 등산로가 백록담보다는 낮은 윗세오름을 향한 것이라고 해서 오르막 경사가 완만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어리목에서 윗세오름에 오르는 등산로의 경사는 성판악에서 백록담을 오르는 등산로보다는 급하고, 관음사에서 백록담을 오르는 등산로보다는 완만한 것 같습니다. 등산로 주위의 울창한 나무들이 강한 겨울바람을 막아주고 겹겹이 옷을 껴입은 채 한 번도 쉬지 않고 올라서 그런지, 한겨울 산속에 있어도 땀이 비 오듯 쏟아집니다. 그래도 사제비 동산에 이를 때까지는 한 번도 쉬지 않겠다는 쓸데없는 고집으로 쉬지 않고 계속 산을 오릅니다. 중간중간 물을 마시지만 쉬지는 않고 오른 끝에 사제비 동산에 도착했습니다.

사제비 동산 주변의 조금 더 높은 곳으로 올라 한라산 밖을 보니 눈의 흔적이 전혀 없는 오름들이 보입니다. 그리고 안을 보니 저 멀리 백록담이 보이면서 그 아래로는 눈으로 뒤덮인 넓은 평야와 같은 만세 동산이 보입니다. 사진에서 눈 위에 보이는 작은 나무들이 사실은 3m 이상 되는 나무들의 꼭대기 부분입니다. 사제비 동산부터 만세 동산까지는 방금까지보다는 오르막 경사가 완만해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깁니다. 일행이 있다면 서로 대화하면서 산책하듯 오를 수 있습니다. 덤으로 주변을 살피다 보면 눈과 나무들로 만들어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예술품을 만나볼 수도 있습니다. 산이 높다 보니 햇빛이 쨍쨍하다가 갑자기 구름이 껴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날씨가 돌변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만세 동산을 걷다 보면 시시각각 조명이 변하는 조각공원을 걷고 있는 듯한 환상에 빠지기도 합니다.

자연이 빚은 다양한 예술품을 감상하며 천천히 걷다 보니 생각보다 빨리 윗세오름 대피소에 도착했습니다. 이미 대피소 여기저기에 저보다 먼저 도착해 삼삼오오 무리 지어 간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거나 사진을 찍는 등산객이 많습니다. 대피소 주변에 까마귀가 많이 있는데, 이 까마귀들은 등산객이 던져주는, 또는 먹고 버린 음식을 먹으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높은 산에도 까마귀가 살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추운 겨울 산에서 인간 외에 다른 생명체를 만나 반갑기도 합니다. 저는 대피소에서 파는 육개장 사발면과 미리 준비한 초콜릿을 먹고 음료수를 마시면서 30분 정도 쉰 후 남벽 분기점으로 향합니다.

윗세오름 대피소에 오른 후 바로 하산하는 등산객이 많아서인지 남벽 분기점으로 가는 길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윗세오름의 높이가 높다 보니 그곳을 걷고 있는 제 발 밑으로 구름이 지납니다. 잠시 신선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높은 산을 등산하다 보면, 구름이 이동하다 산봉우리에 막혀 분리되었다가 산봉우리를 지나 다시 합쳐지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됩니다. 정말 신기한 경험입니다. 하지만 오늘 남벽 분기점까지 가는 길은 좀 지루합니다. 아주 잠시를 제외하고는 내내 구름이 껴 등산로에서 좀 떨어진 곳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 이전에도 겨울에 윗세오름을 수십 차례 올라봤지만 남벽 분기점은 오늘이 처음입니다. 겨울 한라산을 조금 더 보기 위해 시간을 냈는데, 여기서부터는 날씨가 도와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새로운 모습을 더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고 길을 갑니다. 어느덧 서서히 구름이 걷히면서 저 멀리 집 같은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바로 돈내코 경로의 종착점이기도 한 남벽 분기점에 위치한 평궤대피소입니다. 과거에는 이곳에서 백록담 까지 직접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등산객들과 자연재해의 영향으로 훼손이 심해 안식년을 갖게 됐고, 그동안은 입산이 통제된 상태라고 합니다. 잘 살펴보면 산장 주변에 백록담 방향으로 나무 계단의 흔적이 여기저기서 보입니다.

언젠가 다시 개방되는 날 이 경로로 백록담에 오르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윗세오름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윗세오름 대피소에 도착해 보니 등산객들이 더 많아졌고, 그 때문인지 까마귀도 더 많아졌습니다. 저도 그들 틈에 끼어 물을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했습니다. 그리고 영실로 내려가기 전에 화장실에 들렀는데, 창밖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밖에 나와서 보니 쌓인 눈에 창문이 막혀 있었습니다. 한라산에 눈이 얼마나 많이 내리고 쌓이는지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영실로 내려가는 길은 백록담을 등지고 가는 길입니다. 백록담을 감싸고 있던 구름과 그 주변의 구름들이 서서히 내려오더니 여기에 눈바람이 합세하면서 주변이 어두워져 길이 잘 보이지 않기 시작합니다. 그나마 이곳은 어리목 경로보다는 눈이 쌓이지 않아, 붉은 깃발을 보면서 등산로를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깁니다.

한라산은 본래 급작스레 날씨를 바꾸면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줬다 감췄다를 반복합니다. 감췄던 모습을 다시 보여줄 거란 기대를 갖고 어두운 눈길을 쉬지 않고 걸어갑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예상대로 눈바람이 그치고 서서히 구름이 걷히면서 새로운 모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바로 구름이 양쪽으로 갈라지듯 걷히면서 그 사이에 아래로는 상고대가, 저 멀리에는 서귀포시가, 그리고 더 멀리에는 바다가 보입니다. 그리고 계단을 조금 더 내려가자 왼편으로 병풍바위와 폭포가 보입니다.

제가 남벽 분기점에서 다시 윗세오름으로 돌아가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 돈내코가 아닌 영실로 내려가기로 한 이유가 바로 이것들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한라산은 오늘도 제게 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계단을 내려가는 중간에 있는 전망대의 난간에 걸터앉아 물을 마시면서 병풍바위와 폭포를 유심히 둘러봅니다. 매번 봐도 새롭고, 오늘 이곳에 온 것이 잘한 일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가파른 계단을 조심히, 그러나 조금은 빠르게 내려갑니다. 그러다 계단이 없는 내리막 경사에서는 발과 엉덩이로 미끄럼을 타면서 눈썰매를 타듯 내려갑니다. 그리고 영실 입구 부근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제주시행 버스를 타고 어리목 삼거리까지 가서 내립니다.

어리목 등산로 입구까지 걸어가 주차해둔 제 차를 타고 제주시내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갑니다.

사실 이 내용은 4~5년 전 제가 제주에 근무하면서 경험한 것입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것을 글로 옮겼습니다. 사진은 비교적 사실에 가까울 것이나 글은 4~5년이 지나 정확하지 않은 기억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라 전부 사실이라 단정해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이 글을 보시고 겨울 한라산을 오르려는 분이 계시다면, 사전에 반드시 현재도 이 등정기의 내용이 맞는지를 반드시 확인하셔야 합니다. 또한 사진을 잘 정리하지 못하고 또 글 쓰는 재주가 부족하여, 한라산 등정기라면 당연히 백록담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나 정작 윗세오름 사진이 빠져 아쉬움을 느끼신 분께 실망감을 드린 것이 아닌지 하는 걱정을 합니다. 언제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새로운 겨울 한라산 등정기를 준비해 찾아뵙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등산을 하면서 사진을 찍을 때 함께했던 제주법원의 가족들, 너무나 보고 싶네요. 건강히 잘 지내세요.

글_ 심홍걸 서울행정법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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