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 나의 삶 2]황순원의 삶과 문학_『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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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4

1. 오로지 문학만을 생각한 선비

작가의 삶과 그의 문학을 따로 떼어놓고 바라볼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학문적 조류가 형성되어 있으므로, 그것의 결론을 내는 것은 섣부른 예단일 수 있다. 다만 황순원의 생각을 소개하고자 한다.

80년대 어느 가을이었다. 국보위에 불려갔다 오신 선생님께서 심기가 불편하신 착잡한 얼굴로 날씨도 그렇고 하니 술이나 한잔 하자고 하셔서 ‘러시아집’으로 갔다. 술이 몇 순배 도는데도 선생님의 표정이 풀리시지 않아 내가 조심스럽게 “심기가 많이 불편하신 거 같으시네요….”하고 말끝을 흐렸더니, 선생님께서 잠시 침묵하신 뒤 “나더러 국보위 위원이 돼 달라고 하더군. 흠, 나는 못 한다고 했고… 서정주는 수락했지.”하고 말없이 거푸 술잔을 비우셨다. 그러고 나서 “자네 이광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하고 물으셨다. 내가 가볍게, 작품과 사람 평가는 구별할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더니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혼이 떠났으면 그게 사람인가, 시체지! 용서는 진정한 참회가 있은 다음에야 가능한 거야. 참회한다고 「돌베개」를 썼지만 그건, 참회가 아니라, 자기합리화고, 변명이고, 위선이야!”라고 격분하셨다. (194쪽, 강태근 소설가)

위의 짧은 일화에서 황순원의 깊은 생각을 고찰해 볼 수는 없겠지만, 필자가 느끼기엔 그는 작가의 삶과 문학을 같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황순원의 삶은 어떠하였을까? 문학평론가 송현호는 그를 ‘한국현대문학사에 불멸의 발자취를 남긴 거목이며 우리 시대의 어른’이라고 평가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 많은 문인들이 친일을 할 때도, 좌파가 문단의 헤게모니를 장악할 때도, 우파가 반공문학의 가치를 높이 들 때도, 개발독재 시대에 많은 문인들이 권력에 아부할 때도 의연하게 처신한 선비 중의 선비’라고 덧붙였다. 황순원은 어떠한 권력과도 결탁하지 않았으며, 상과 벼슬에도 관심이 없었다. 황순원의 고고한 삶을 이해하는 것 역시 그의 문학을 이해하는 방법일 수 있기에 그의 삶을 고찰해보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자는 ‘소인은 이기입지소인심(利己立志小人心)이요, 군자는 이타자의선행심(利他自義善行心)이다.’라고 말했다. 소인은 내가 잘되기를 먼저 생각하지만 군자는 남이 잘되기를 먼저 생각한다 했으며, 소인은 남의 잘못을 좋아하지만 군자는 남의 잘못을 감싸주고 용서해 준다고 했다. 황순원은 타인에게 관대하였으나 자신에게는 철저하게 엄격했다.

황순원 교수님은 다 알고 있다는 듯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하셨다.
“소설과 영화는 장르가 다르지 않나. 영화를 하겠다고 승낙을 했으면 신작가에게 맡겨야지. 내 소설이 어떻게 변해도 상관하지 않을 테니 신작가가 모두 알아서 해….“ (22쪽, 신봉승 극작가)

자신의 소설이 영화화되자 각색을 맡은 극작가(제자)에게 한 말이다. 황순원은 문학적 열정과 자존심이 대단하여 자신의 글을 고치고 또 고치기로 유명했다. 그런 소중한 작품이 영화화된다는데 그는 왜 극작가에게 모든 것을 일임한 것일까? 그것은 바로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이 그의 삶 속 깊이 스며들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황순원은 아들의 친구와도 맞담배를 할 만큼 소탈했으며, 제자가 여러 번 책을 빌려 가고도 한 번도 돌려주지 않았음에도 꾸지람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말이 제자에게 상처가 될 수 있음을 알고 혼내지 않았던 것이다.

타인에게는 관대하였지만 자신에게는 엄격했던 그의 족적은 특히 문학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철저한 완벽주의자였다. 이는 후배문인들의 여러 증언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나는 수많은 필자를 대했지만 그분처럼 유난하고 대단한 완벽주의는 처음 보았다. 한 나라의 대표적 작가인 그가 단편 하나에 들이는 정성이 그러했다.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를 4백 차례 교정했다고도 하지만. (89쪽, 호영송 소설가·시인)

쓰다가 적당히 만족해버린 작품과 고치고 또 고치면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쓴 작품은 어디가 달라도 다르게 마련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쓴 작품은 명작의 반열에 오른다. 황순원 선생님께서 그런 모범을 보여 주셨다. (중략) 지금과 달라서 그때는 활판 인쇄였고, 교정을 최소한 세 번은 보았다. 선생님께서는 세 번의 교정을 직접 보셨는데, 세 번 다 새빨갛게 고치셨다. 말이 고쳤다는 것이지 사실은 새로 쓴 것이나 다름없었다. 교정지를 보고 질려 버린 인쇄공이 매번 손사래를 칠 정도였다. (34쪽, 유종호 문학평론가)

스스로를 끊임없이, 혹독하게 시험하였던 문인 황순원, 이렇듯 그는 군자와 닮아있다.

군자의 나라 조선에서는 시 짓기와 같은 문학적 소양을 관리의 능력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시의 위상이 드높았다. 황순원 역시 시라는 문학과 연관이 깊다. 작가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문학은 소설이지만, 그의 문학적 출발은 시였기 때문이다. 황순원에게 초기작(주로 시)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판을 달리할 적마다 작품을 손봐 오는 편이지만, 해방 전 신문 잡지에 발표된 많은 시의 거의 다를 이번 전집에서도 빼 버렸고, 이미 출간된 시집 『방가』에서도 27편 중 12편이나 빼 버렸다. 무엇보다도 쓴 사람 자신의 마음에 너무 들지 않는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읽힌다는 건 용납될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빼버리는 데 조그만치도 미련은 없었다. 이렇게 내가 버린 작품들을 이후에 어느 호사가가 있어 발굴이라는 명목으로든 뭐로든 끄집어내지 말기를 바란다.
- 황순원 『말과 삶과 자유』 중에서

그는 자신의 마음에 안 드는 본인의 작품이 대중들에게 읽히는 것을 거부했다. 그의 문인으로서의 사명감(내지는 자존심)이 얼마나 깊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문학의 거울과 저울』의 저자 김종회는 이런 황순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후학들이 황순원의 작품을 발굴하여 공개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그 사유가 타당하다. 이미 그의 명성과 작품의 문학사적 의의가 공공의 차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라면 황순원도 수긍하지 않을까?

황순원은 문학 외의 글(소위 잡문)을 기피하였는데 몇 가지 이유를 추측해보자면, 그는 순수문학에 대한 열망이 대단하여 그것에만 집중하길 원했고, 권력과 인기에는 관심이 없어 텔레페서와는 거리가 멀었다. 또 다른 이유 역시 아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노트 두 줄 잡아 한 줄씩 써 내리고 남은 칸이 채워지도록 문장을 고친 다음 그걸 다시 원고지에 정서하고 그 위에 됐다 싶을 때까지 손을 본 다음 원고를 잡지사에 넘기고 교정지가 나오면 또다시 빼꼭히 수정하고서야 작품이 완성된다 하셨다. 그리고는 그 작품을 다시 고치고 다듬어서 단행본을 묶고 또다시 그 같은 과정을 거쳐 전집을 낸다는 말씀이셨다. 중단하신 신문연재도 말씀하셨는데 기실 신문연재란 성에 찰 때까지 수정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말씀처럼 들렸다. 선생님의 명문장은 이같이 연속된 절차탁마의 소산이었다. (152쪽, 김종 시인)

최인호의 「술꾼」은 두 시간 만에 일필휘지로 쓰였다고 세간에 알려져 있다. 그의 천재성이나 작품 역시 대단한 것이지만 그것은 황순원의 방법은 아니다. 황순원은 여러 번 고쳐 써야 직성이 풀리는 문인이었으므로 퇴고를 마음껏 할 수 없는 신문연재는 그의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2. 「소나기」로 대표되는 그의 문학?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황순원의 대표작은 누가 뭐래도 「소나기」이다. 소년 소녀의 순수한 사랑을 다뤘다는 점, 교과서에 실려 주로 사춘기 시절 읽혔다는 점 등이 국민들의 감수성을 자극하여, 봄날 소나기만 보면 아련하게 첫사랑을 떠올리게 만드는 주된 이유가 된 국민소설 「소나기」. 그렇다면 황순원도 그의 대표작을 「소나기」로 생각하였을까?

문학평론가 권영민은 ‘황순원 선생의 소설을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한국 현대 소설사를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소나기」만으로 이런 찬사를 듣기는 힘든 일일 것이다. 황순원의 문학을 「소나기」로 한정하기엔 그의 또 다른 명작들이 너무나도 많다고 비평가들은 주장한다.

문학평론가 조남현은 황순원의 소설을 ‘낙오자들을 휴머니즘의 손길로 어루만진 소설’, ‘사랑의 문제를 깊이 있게 파헤친 소설’, ‘해방 직후의 혼란상을 다룬 소설’, ‘한국전쟁이 빚어낸 비극을 인상 깊게 그려낸 소설’, ‘삶의 원형질을 찾아내려 한 소설’ 등으로 분류하였다. 이런 작업은 황순원 문학이 「소나기」로 정의되는 것에 대한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소나기 굴레’를 벗어나는 것이 그의 문학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첫 발걸음은 아닐까?

황순원 문학은 어떠한 비판을 받는가? 대표적인 것으로 역사의식과 사회적인 감각이 부족하다는 평가일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태동은 이러한 지적에 반발한다. 황순원 문학의 숨은 뜻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태동은 황순원 문학에, ‘역사의 내면 구조인 신화가 있고 삶에 대한 뜨거운 진실이 있으며 인간정신을 주장하는 강한 모럴리티가 있다.’고 주장했다. 문학평론가 염무웅 역시 해방기 황순원 소설에는 사회성이 짙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태동과 염무웅의 주장은 ‘소나기 굴레’에 갇힌 비평가들에 대한 일종의 호소라고 볼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황순원에게는 「소나기」말고도 단편 「별」, 「독 짓는 늙은이」, 「목넘이 마을의 개」, 장편 『카인의 후예』, 『나무들 비탈에 서다』 등의 수많은 명작들이 있다. 그렇다면 황순원이 생각했던 그의 대표작은 어떤 작품이었을까?

「소나기」는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고 지금도 여전히 선생님의 대표작으로 사랑받고 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생전에 그 같은 평가에 대해 자주 불만을 토로하셨다. 언젠가 박사과정 강의가 끝나고 김용성, 조태일 형 등 몇이서 선생님을 모시고 휘경동에 있는 ‘러시아집’에 갔을 때의 일이 떠오른다. 1984년도 늦가을쯤으로 기억된다. ‘러시아집’은 뚱뚱한 주인마담과 주점 분위기가 러시아 풍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경희대 국문과 대학원생들이 교수님들을 모시고 잘 들르는 간이음식점이었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분위기가 시국 얘기로 돌아가는데 지방 대학의 김 모 교수가 느닷없이 「소나기」 얘기를 꺼냈다. 전란의 포성이 요란했던 1953년 4월에 어떻게 그런 순정한 감성을 담은 작품을 쓰실 수 있었냐며,「소나기」는 한국소설의 진수를 보여주는 대표작이라고 용비어천가를 읊어댔다. 그러자 선생님께서 서운함과 화가 담긴 목소리로 “왜들 ‘소나기’얘기만 하는 거야! ‘움직이는 성’은 읽어보지도 않고들!” 하시면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간의 평가가 작가로서는 못내 서운하시다는 감정이 그 한숨 속에 깊게 배어 있음을 느꼈다.

『움직이는 성』은 선생님께서 자선하신 대표작이며, 야심작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움직이는 성』은 한국인의 유랑민 근성을 ‘움직이는 성’에 비유하여 작중인물들을 통해 예리하게 통찰하고 비판한 작품이다. 그리고 그 구원의 궁극은 기독교의 진정한 사랑으로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담긴 소설이다. 선생님께서 『움직이는 성』을 집필하실 때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셨는가를, 아는 제자들은 다 안다. (192쪽, 강태근 소설가)

황순원은 생전에 자신의 대표작으로 『움직이는 성』을 뽑은 듯하다. 소설가 우한용은 ‘한 번 읽은 작품이 30년 넘게 기억에 남고, 그 기억을 되살리게 되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황순원 선생의 『움직이는 성』이 그렇다. 내 문학의 여정이 반려가 된 셈이다.’라고 평했는데, 『움직이는 성』의 높은 작품성과, 소설에 담긴 작가의 혼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위의 일화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자신의 문학이 「소나기」로 정의되는 것을 경계하였고, 서운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문학에 대한 평론가들의 비판, 즉 ‘서정적이며 시적이나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이 부족하다는 점’, ‘문장과 구성은 아름답지만 남녀 간의 순수하고 사랑을 추구할 뿐 고차원의 주제의식을 끌어내지 못한다는 점’ 등의 평을 들었을 때 자연스레 「소나기」가 떠올라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아이러니하게도 경기도 양평2)에 가꾸어진 황순원 문학촌의 이름은 ‘소나기 마을’이다. 위의 일화에 기대어 생각해 볼 때, 그가 서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소나기」가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소설이라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의 올곧고 관대한 삶의 족적을 보았을 때 만약 그가 살아있었다면 요샛말로 쿨하게 넘어가지 않았을까 싶다.

글뿐만 아니라 인품에도 기품이 있어 이른바 안티가 없었던 황순원.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여 년이 되었음에도 아직까지 모두의 귀감이 되는 까닭이다.

1) 김종회, 황동규 외(2018),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 - 소나기마을이야기』, 작가

2) 소나기 마을이 양평에 가꾸어진 이유가 참 재미있다. 소설 「소나기」의 후반부에 ‘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 간다는 것이었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주머니 속 호두알을 만지작거리며 한 손으로 수없이 갈꽃을 휘어 꺾고 있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소설에서 양평이란 지명은 이 부분에서 단 한 번 나온다.

글. 이정훈 실무관(인천지방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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