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 나의 삶 3]묵향을 맡으며

테마가 있는 글

2019.06.04

묵향을 벗한 지 4년 고개를 넘었다.

검은 먹물로 하얀 화선지를 一筆一筆 채워가는 기쁨을 같이해 보자며 권유했던 박계장님은 이태 전에 법무사 개업을 했다. 입문 초, 서예실이 사무실 가까이에 있었고, 선생님이 1주일에 한 번 오셔서 체본(體本, 크게 한문에는 五體가 있는데 어느 한 체의 교본)을 써주시고 독려해주셨기에 그리고 그다지 큰 욕심 없이 하루에 한 장만 써보자는 생각이었기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가랑비에 옷 젖듯 정이 들었다. 평생 함께 하고픈 친구다.

화실에 들어서면 먼 과거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은은한 묵향이 코를 자극하며 온몸을 휘감는다. 방금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왔건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낯선 나를 마주한다.

4평 남짓한 ‘ㄱ’형 공간에 120×60㎝ 철제 책상이 벽을 마주보고 7개, 중앙에 6개가 둘씩 마주보고 놓여 있다. 책상 위에는 녹색 모전(깔판)이 잔디처럼 깔려 있다. 누런 벽에는 선생님의 한글 작품, 문인화,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체 작품들이 빼곡히 도배되어 있다.

출입문 오른쪽 첫 번째 책상이 나의 자리다. 책상 위에는 나의 벗들! 벼루, 먹물, 접시, 사발이 각 1개 그리고 180㎖의 델몬트 병이 세 개 놓여 있다. 글씨용 큰 붓 1개, 사군자 붓 2개가 델몬트 병 속에 먹물을 머금은 채 머리를 깊숙이 파묻고, 언제나 와서 바로 글씨를 쓸 수 있도록 누워 있다. 국화 그림과 전서체 16자가 쓰인 2장의 화선지를 벽에 붙이고, 따라 그려보고 따라 써본다. 선생님이 체본을 써주시거나 그려주실 때 휴대폰으로 촬영해서 그것을 보면서 연습을 하는 회원도 있다. 글씨 한 장, 그림 한 장이 나의 하루 분량이다. 1주일 후에 선생님이 오셔서 숙제를 봐 주시고 다음 과제를 내주신다. 지겨워서 포기할까봐 진도는 빼주시지만 연습량이 턱없이 부족해서 실력이 늘 제자리인 듯하다. 붓을 들면 시간이 너무나 빨리 지나간다. 그래서 먹을 갈아 쓰는 대신 먹물을 구입하여 사용하고 있다. 좀더 연습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지금은 일이 우선이므로 이나마 꾸준히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퇴직하면 맘껏 해야지’하면서 아쉬움을 달랜다. 점심식사 후 40분 정도 연습하고 나면 소화도 잘되고 일을 더 집중해서 하게 되는 것 같다.

처음 배운 게 해서체다. 신문지에 一, 亅, 永 등 기초적인 연습을 한 후에 2014. 11. 11.부터 지영해서천자문(智永楷書千字文)을 쓰기 시작했다. 天에서 也까지 다 쓰는 데 1년 6개월 정도 걸렸다.

그 후 행서, 초서, 예서는 짧은 책을 골라 6개월씩 맛만 보았다. 지금은 전서체를 배우고 있다. 행서를 쓰면서부터 사군자와 병행하게 되었다. 글씨 쓰다가 그림으로, 그림에서 글씨로 붓을 잡은 사람은 둘 다 배우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림과 글씨가 결국 같다는 게 모든 분야를 두루 섭렵하신 선생님의 말씀이다.

사군자는 난부터 치기 시작했다. 대나무, 매화를 거쳐 지금은 국화를 그리고 있다. 국화는 종류가 많아서인지 사군자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배우고 있다. 1년이 지나니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이때 국화를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 정민의 조선 지식인의 내면 읽기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에서 만난 다산 정약용이다.

제자 황상이 은자의 이상적인 공간이 어떠해야 하는지 물었을 때 <제황상유인첩(題黃裳幽人帖)>에서 이런 얘기를 한다. “뜰 앞엔 울림벽을 한 줄 두르는데, 높이는 몇 자 남짓이면 된다. 담장 안에는 석류와 치자, 목련 등 갖가지 화분을 각기 품격을 갖추어 놓아둔다. 국화는 가장 많이 갖추어서 48종 정도는 되어야 잘 갖추었다 할 만하다.” 국화를 48종이나 알고 있다니! 옛날에도 개량종이 아닌 우리나라 국화가 이렇게 많았는가!

그는 목민심서를 지은 근엄한 사상가일 뿐만 아니라 섬세한 감성을 지닌 아취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국화의 빼어난 점으로 늦게 꽃을 피우는 것, 오래도록 견디는 것, 향기로운 것, 어여쁘지만 요염하지 않고 깨끗하지만 차갑지 않은 것 네 가지 외에 ‘등불 앞 국화의 그림자’도 꼽고 있는데 장난스럽기조차 하다. 국화꽃으로 그림자놀이를 하며 벗들 간에 즐겁게 노니는 광경을 묘사한 <국영시서(菊影詩序)>를 보자.

정약용: “오늘 저녁 자네가 우리 집에 자면서 나와 함께 국화를 보는 것이 어떻겠나?”

윤이서: “국화가 비록 아름답다고는 하나 어찌 밤중에 볼 수가 있겠는가?”

정약용: “어쨌든 가보기나 하세.”

(저녁이 되었다. 옷걸이와 책상 등 여러 가지 방 안에 있던 산만한 물건들을 치우고, 국화의 위치를 정돈하여 벽에서 약간 떨어지게 하였다. 그리고 등잔도 꼭 알맞은 위치에 놓아두고서 불을 밝혔다.)

그러자 기이한 무늬와 희한한 형상이 갑자기 벽에 가득 차오는 것이었다.

① 가까운 것은 꽃과 잎이 엇갈려 있고 가지와 줄기가 또렷하고 가지런한 것이 마치 수묵화를 그려놓은 것만 같았다.

② 그 다음 조금 떨어진 것은 너울대고 어른대는 그림자가 춤추듯 하늘거리는 것이 마치 동산에 달이 떠올라 뜨락의 나뭇가지가 서쪽 담장에 일렁이는 듯하였다.

③ 먼 것은 흐릿하고 모호해서 마치 구름 노을이 엷게 깔린 것만 같고, 사라질 듯 여울지는 것은 파도가 넘쳐흐르는 듯하였다.

윤이서: “기이하고 기이하다! 천하의 뛰어난 광경일세그려.”

정약용은 강진에서 19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고 한다. 타의로 집과 가족을 떠나 그것도 한 20년가량 떨어져있게 된다면 어떨까? 가족과 떨어져 산 아버지가 아비 노릇하는 방법은 아마 편지로 아내에게 안부를 전하고 자녀들을 교육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부부는 어쩜 그리 닮았는가. 아내는 모든 게 궁핍한 유배지에 있는 남편에게 시집올 때 입었던 활옷을 보낸다. 붉은빛은 이미 씻겨 나갔고, 노란빛도 엷어져서 글씨에 쓰기에도 맞춤인 낡은 치마를 보낸다. 남편은 낡은 치마를 가위로 잘라 작은 첩을 만들어 붓 가는 대로 경계하는 말을 지어 두 아들에게 보낸다. 그리고 3년 후에는 남아 있는 한 폭에 그림과 시를 적어 시집간 외동딸에게 보낸다. 매화 가지 위에 앉아 있는 두 마리의 새를 그리고 그 밑에 화목한 가정 이루어 다복하게 잘 살라는 시를 적었다. 어머니가 시집오시던 날 입었던 빛바랜 치마 위에 아버지가 훈계의 말씀을 써서 보내주시다니! 자녀들은 보면서 어버이의 아름다운 은택이 느껴져 가슴이 뭉클한 느낌을 가졌으리라. 궁핍과 그리움이 빚어낸 아름다운 예술품! 고려대 박물관에 이 매조도(梅鳥圖)가 있다는데 한번 보고 싶다.

가족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 문득 친정아버지 생각이 난다. 초등학교 시절 새 교과서를 받아오면 달력으로 곱게 책 꺼풀을 입혀 과목과 이름을 써 주시고, 연필을 가지런히 깎아 주시던 아버지! ‘세상 부모는 하나도 다를 것 없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다산이 맡았던 묵향을 나도 맡고 있다. 흑에도 색이 있다. 농담만으로도 다양한 표현을 하는 묵의 세계는 넓고도 깊다. 뭔가를 쓰고, 그린다는 것은 자기와의 친밀한 대화이기도 하지만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긴 여운을 남긴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더니 국화를 그리니 국화가 보이기 시작한다.

화선지, 먹물 그리고 붓만 있으면 준비 끝이다. 둔하고 답답해도 할 수 있다. 아니, 오히려 그런 사람이 할 수 있다고 다산은 말씀하고 있다. 대저 둔한데도 꾸준히 연마하는 사람은 그 빛이 반짝반짝 빛나리라.

글. 홍주안 사무관(서울회생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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