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산책 休] 장흥의 길 위에서

테마법원

[도시 산책 休] 장흥의 길 위에서

2020.02.06

사부작사부작 느리게

장흥의 길 위에서

여행이라면 모름지기 한 박자 쉬어가는 법. 쫓기듯 바쁜 여행보다는 구석구석 천천히 둘러보는 여행이 더 구미에 맞는다. 느림을 만끽하고자 장흥 시내버스에 올라 어디부터 가 보면 좋을지 묻자 한 할머니가 “장흥은 아무 데고 다 좋다”며 옛날 사탕 하나를 손에 쥐여 준다. 정겨움을 가득 안고 사부작사부작 장흥의 길 위로 발걸음을 옮겨 보았다.

글. 노초롱 + 사진. 손호남

마음에 안식을 주는 천년 고찰 보림사

가지산에 자리한 보림사는 인도 가지산의 보림사, 중국 가지산의 보림사와 더불어 ‘동양 3대 보림’으로 불린다. 여기에서 일컫는 ‘가지’의 의미는 모든 생명이 원래 부처라는 차별 없는 지혜를 뜻하고 ‘보림’은 모든 중생에게 걸림 없는 자비를 실천하는 보살행을 말한다고 하니 보림사는 그 이름에서부터 경건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처음에는 원표 대사가 가지사라는 이름의 암자를 지었는데, 860년경 신라 헌안왕(憲安王)의 권유로 보조선사 체징이 창건하여 보림사가 됐다. 특히 보림사는 우리나라에 처음 선종이 들어와 정착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선종(禪宗)은 참선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을 중요시하는 불교의 한 종파를 이른다.
한때는 화순 쌍봉사, 곡성 태안사와 더불어 손꼽히는 큰 절이었고 그 뒤로도 번창해 웅장한 규모를 자랑했다고 한다. 그러나 1950년 결정적인 사건으로 폐허로 변하게 됐다. 한국전쟁 때 공산군 유격대가 보림사에 잠시 머물렀는데, 군경토벌대가 ‘공비들의 본거지’라며 보림사에 불을 지른 것이다. 그 사건으로 일주문과 천왕문을 제외한 대부분이 불에 타면서 본래의 모습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현재의 건물들은 대부분 근래에 다시 건립된 것이라 옛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신기한 것은 대부분이 화재로 소실될 때도 타지 않고 남았다는 국보 제117호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보물 제1254호인 목조사천왕상이다. 특히 이 사천왕상은 중종 10년(1515년)에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현재 남아 있는 목조 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귀중한 유물이다.
이뿐만 아니라 경내에는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된 남북 삼층석탑 및 석등, 대웅보전 뒤쪽에 있는 보조선사창성탑비, 보조선사탑 등 곳곳에 역사적 가치가 담긴 보물들이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피톤치드 가득한 정남진 편백숲 우드랜드

장흥읍 시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억불산 자락에 40년생 이상 된 편백이 빼곡히 들어선 편백숲 우드랜드는 자연을 느끼며 힐링하기에 제격인 곳이다. 목재 문화체험관에서 나무로 만든 아기자기한 장식품을 구경하고 나오면 본격적인 편백숲이 시작된다. 산책로를 따라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가슴속 깊이 깨끗한 공기가 전해져오는 것만 같다. 여러 산책로가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곳은 ‘사색의 숲’이다. 이름처럼 조용히 명상을 하거나 독서를 즐기기 좋게 마련돼 있다. 테이블과 벤치 말고도 바닷가에서만 봄직한 선베드도 놓여 있어 한 군데 자리를 잡고 오롯이, 원하는 형태의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숲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톤치드를 만끽하며 잠시 거닐다 보면 일상의 스트레스가 풀리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온통 초록으로 싸여 있는 주위를, 그저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삼림욕 효과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나가는 모습에 집중하다 보면 마음에도 평온함이 밀려온다.

흥겨움에 들썩 정남진 토요시장

장흥 장터는 2일, 7일에 맞춰 장이 열리는데 특히 토요시장은 1961년부터 우리나라 최초로 주말시장을 열기 시작해 지금까지 대표 전통시장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시장에는 텃밭에서 직접 키운 채소부터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신선한 해산물과 키조개 그리고 장흥에서 채취한 표고버섯까지 입맛을 돋우는 식자재가 가득하다. 비단 장만 열리는 것이 아니라 재래시장의 흥을 한껏 돋우는 각종 공연도 펼쳐진다. 날만 잘 잡으면 장흥의 전통농악인 버꾸농악 공연과 각종 풍물놀이, 품바 공연까지 흥겹게 즐길 수 있다. 공연이 한번 시작되면 신나는 가락에 아예 자리를 잡고 관람하는 이들과 구경하는 사람들까지 한데 섞여 전통시장의 멋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다양한 볼거리도 그 인기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장흥의 명물, 한우삼합이다. 가까운 목포와 광주, 멀리는 경상도와 충청도, 그리고 서울에서도 한우삼합을 맛보기 위해 즐겨 찾는다. 신선한 한우를 값싸게 구입해 인근 식당에 가서 키조개, 표고버섯과 함께 먹으면 그 맛이 그렇게 일품이란다. 시장 곳곳에 늘어선 한우 식당들이 그 인기를 말해 주는 듯하다.
한우삼합도 유명하지만 겨울이라면 또 장흥 매생이를 빼놓을 수 없다. 제철 음식이라 일 년 내내 만날 수 없으니 겨울에만 꼭 맛볼 수 있는 별미인 셈. 장흥 사람들에게는 매생이탕과 매생이 떡국이 추운 겨울을 든든하게 보내는 겨울 보양식이나 다름없다. 파래처럼 생긴 매생이가 떡을 한가득 에워싸고 있어 한 수저만 떠도 바다향이 코끝에 전해지는데, 소금이나 간장만으로 간을 해서 그런지 국물 맛이 깊고 담백하다.
배를 든든하게 채운 다음에는 장터에서 멀지 않은 벽화 거리로 나서 본다. 다른 지역의 벽화랑 다른 점이 있다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7080 추억을 담았다는 것. 2018년에 조성돼 아직 크게 붐비지는 않지만 입소문만 나면 통영 동피랑 못지않게 찾는 이들이 늘어날 것이다. 어린 시절 즐겨 본 만화 <둘리>를 비롯해 추억을 재현해 놓은 아기자기한 그림들이 낮은 담장과 어울려 걷는 즐거움을 더한다.
발길 닿는 대로 느리게 둘러본 장흥은 고즈넉함과 정겨움을 동시에 품은 곳이다. 여유로운 마음과는 다르게 금세 흘러간 시간에 못내 아쉬움이 남았지만, 언제고 다시 찾을 날을 기약하며 이쯤에서 장흥 여행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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